제6장 뻔뻔스러운 여자
강준은 시동을 걸자마자 차 앞에 귀신처럼 나타난 정다은을 발견했다.
아까부터 귀신을 운운한 이유는 그녀가 전날에 메이크업을 진하게 하고 밤새 광란의 시간을 보낸 탓에 어느새 화장이 싹 다 지워지고 눈 밑에 마스카라까지 번졌기 때문이다.
사실 정다은은 외모만 보면 나쁘지 않았다. 168cm의 키에 몸매도 날씬했기에 하이힐을 신으면 단연코 롱다리 미인에 속했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마주한 순간에 드는 감정은 오로지 혐오감뿐이었다.
이때, 김연아도 차 앞을 가로막은 여자를 발견했고 말을 걸려고 창문을 내리자 상대방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차에 탄 강준을 향해 외쳤다.
“강준, 당장 내려오지 못해!?”
기세등등한 표정은 마치 남편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아내 같았다.
그와 동시에 김연아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연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내 강준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차 앞에서 씩씩거리는 여자를 보고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강준이 갑자기 클랙슨을 울렸다.
유난히 큰 소리 때문에 차 앞에 서 있던 정다은은 깜짝 놀라 귀를 틀어막았다.
“어디서 잘난 척이야? 지금이라도 내려오면 우린 아직 만회할 여지가 있어. 아니면 평생 다시는 날 볼 생각하지 마.”
정다은은 정녕 아직도 둘이 사귀는 줄 알고 있는 건가?
물론 이는 두 사람 사이의 관행이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한 지난 몇 년 동안 강준은 항상 이별 통보를 받는 입장이며, 그러고 나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화를 풀어주고 애원하고 달래주는 걸 반복했다.
결국 어렵사리 기분이 풀리면 그제야 정다은은 마지못해 용서해주곤 했다.
어쩌다 보니 이런 루틴은 점차 습관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서 이 관계를 끝낼 수 있는 사람도 본인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어젯밤에 잘못은 했으나 사과하면 그만이니까.
“아니면 우선 내려가서 여자친구부터 달래줘.”
김연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강준은 한숨을 내쉬더니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아 누나, 우린 어제저녁에 이미 헤어졌어요.”
“어제 헤어졌다고?”
김연아는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정다은을 바라보았다.
아까 분명 목덜미에서 키스 마크를 보지 않았는가? 게다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느낌이었다.
즉 어젯밤에 둘이 헤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강준이 남긴 키스 마크는 절대 아니었다.
그녀는 속으로 눈앞의 여자가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도 저지른 건 아닌지 싶었다.
어쨌거나 경험자로서 이미 대충 짐작이 갔다.
강준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젯밤에 바람 피우는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거든요.”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김연아는 어이가 없었다. 남자 친구에게 바람 피우는 걸 들켰는데도 기세등등한 모습이라니?
이런 무모한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희미하게 떨리는 두 팔과 화가 나서 하얗게 질린 강준의 입술을 보는 순간 그녀는 숨을 고르더니 차 문을 벌컥 열었다.
차에서 내리는 김연아를 보고 강준은 넋을 잃고 말았다. 사실 정다은이 뻔뻔스럽게 다시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지라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되레 머리가 하얘졌다.
따라서 이런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무지 몰랐다.
그렇다고 여자를 때릴 수 없는 법이다. 비록 맞을 짓을 한 건 사실이며, 심지어 어젯밤에 살인 충동까지 들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해 보니 자신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고작 이런 여자를 죽이려고 목숨까지 걸다니, 그야말로 밑지는 장사이지 않은가?
다만 김연아의 오해를 사기는 싫었다. 이 정신 나간 여자가 또 어떤 입에 담기 힘든 말을 할지 벌써 걱정되었다.
그러나 이때, 정다은에게 다가간 김연아는 팔을 번쩍 들더니 대뜸 뺨을 후려갈겼다.
“감히... 날 때려? 이 여우 같은 년이 어디서 손찌검이야!”
정다은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초면에 뺨부터 때리는 여자라니!
“이건 준이를 대신해서 때린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팔을 들어 올리고 또다시 따귀를 날렸다.
짝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뺨을 맞은 정다은은 중심을 잃은 나머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이건 방금 날 여우라고 욕한 몫이고.”
김연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처럼 더러운 여자는 강준이랑 사귈 자격이 없어. 지금부터 준이는 내 남자야. 앞으로 한 번만 더 찾아온다면 다리를 문질러 버릴 테니까 각오해. 꺼져, 괜히 알짱거리지 말고.”
“이 년이...!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정다은은 화가 나서 노발대발하며 김연아를 손톱으로 할퀴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김연아의 발에 걷어차였는데, 그녀가 때마침 하이힐을 신은 탓에 딱딱하고 뾰족한 굽에 정통으로 맞았다. 결국 배를 움켜쥔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연아는 도도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비아냥거렸다.
“너 같은 뻔뻔한 여자는 지겹도록 봐왔거든?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자존심은 집어치워. 고약한 심보를 가진 사람은 시궁창의 구더기보다 못하니까.”
“어디 가지 말고 딱 기다려. 네년한테서 아주 혹독한 대가를 받아낼 거야!”
정다은이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김연아는 차에 돌아가 떠나려던 참이었지만, 전화를 거는 정다은을 보자 오히려 멈추어 섰다.
이때, 강준도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놀랍도록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었다.
그는 김연아가 자신을 위해 정다은에게 본때를 보여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내대장부로서 어찌 여자에게 손찌검하겠는가?
그러나 같은 여자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건 납득이 갔기에 어떻게 보면 그녀가 대신 화풀이해 준 셈이었다.
“천수 씨, 저 얻어맞았어요...”
정다은은 휴대폰에 대고 교태를 부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아직도 자는 줄 알고 집에 와서 짐을 챙기고 다시 호텔에 가서 같이 있어 주려고 했죠. 그때가 되면 오빠도 이미 깨어났을 테니까. 하지만... 집 앞에서 강준에게 갑자기 얻어맞게 되었어요. 심지어 여우 같은 년을 찾아서 날 괴롭히기까지 했단 말이에요! 네네, 맞아요. 주소는 제가 보낸 거기... 역시 오빠밖에 없네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내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일어서는 대신 아예 보닛에 걸터앉아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어디 가지 말고 딱 기다려. 아주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할 테니까 두고 봐.”
곧이어 얼음장처럼 싸늘한 눈빛으로 강준을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에 설령 오해가 생기더라도 말로 잘 풀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래, 어젯밤에 작은 실수를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그게 뭐 어때서? 적어도 내 마음속에는 항상 네가 있었어.”
“지난 4년 동안 내 청춘을 모조리 바쳤지만 결국 빈털터리와 다름없었어. 심지어 중고 냉장고에 침대마저 철제 프레임인 집에서 만약 널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4년이나 버텨냈을까?”
“어쩌다 어젯밤에 잘못한 걸 가지고 왜 그래? 너도 지금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 셈이잖아.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핑계 따위 집어치워. 둘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걸 똑똑히 봤거든?”
“너처럼 순박한 남자도 몰래 바람 피울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운 좋게 부잣집 여자가 걸린 것 같은데 이제 퉁친 거지? 물론 내가 먼저 양다리 걸쳤지만 너도 몰래 바람 피운 셈이니 서로 빚진 게 없는 거야.”
“어쨌거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정 헤어지고 싶다면 그렇게 해. 다만 4년 동안 허비한 내 청춘에 대한 보상을 청구할 거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딱 8,000만 원만 줘. 아니면 내가 과분한 짓을 해도 날 원망하지 마.”
정다은의 말에 강준은 되레 너털웃음을 지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정다은은 이 속담을 완벽히 입증했다.
살다 보면 정말 별의별 일을 겪기 마련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연아는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갑자기 벨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차 뒤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이때, 멋진 스포츠카 두 대가 빠르게 다가왔고 흰색 람보르기니를 선두로 노란색 머스탱이 뒤를 따랐다.
차가 멈춰서자 이천수가 잽싸게 튀어나왔다. 이내 다른 차에서도 야구 방망이를 든 청년 두 명이 잇달아 내렸다.
“여친에게 배신당한 놈 주제에 감히 내 여자를 때려? 죽고 싶어 환장했어?”
이천수는 강준을 패려고 곧장 돌진해 왔다.
하지만 이때, 전화를 끊은 김연아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난 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결국 천수였어? 우리 준이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죽을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