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운 없는 경비원
강성시.
밤 10시, 가로수길 서양로에 위치한 헌터바라는 유흥 업소 룸에서 끊어질 듯한 신음과 욕설이 섞인 감탄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다만 음악을 워낙 크게 틀어서 소리가 묻힌 나머지 잘 들리지는 않았다.
이때, 180cm가 넘는 큰 키의 남자가 룸 밖을 서성이며 죽상이 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이름은 강준, 바로 헌터바에서 500m 떨어진 술집의 경비원이다.
“아닐 거야. 다은이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데,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아마 농담이겠지...”
강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방문을 열려고 몇 번이나 팔을 뻗었지만 허공에서 멈칫하다가 제자리로 가져갔다.
한 시간 전, 헌터바 경비원 연기태가 정다은을 봤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바로 이 룸 안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오늘 밤 회사에서 야근한다고 말했었다.
따라서 연기태를 의심하고 욕설까지 퍼부었다.
나중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다은에게 연락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연속 10여 통이나 걸었는데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불안한 마음에 정다은의 회사로 전화해서 직접 확인했다.
그러나 정다은 소속 부서는 일찌감치 퇴근했고, 오늘 밤에 야근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대답만 들려왔다.
강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고,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체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정다은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굳게 믿고 있을 뿐이다.
“그래, 아닐 거야. 절대로! 다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 기태가 잘못 본 게 확실해. 안에 있을 리가 없어!”
강준은 심호흡한 뒤, 용기를 내어 비로소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룸에서 정다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즉시 집으로 돌아갈 것이며 앞으로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남녀 간에 제일 중요한 게 믿음과 신뢰이므로 서로 확신이 없으면 평생 함께하기 힘든 법이다.
룸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강준의 귀에 피를 들끓게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아! 오빠...”
이내 목소리를 따라 희미한 불빛이 비치는 룸 안을 들여다보았다.
늘씬한 몸매에 갈래머리를 한 여자가 소파에 무릎 꿇은 채 한창 코스프레 놀이하고 있었다.
게다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애원하며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정다은이지 않은가?
강준은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눈앞의 광경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윙윙 울리고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이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두 남녀를 향해 뛰어갔다.
그와 동시에 맥주병 하나를 집어 들고 더러운 연놈을 끝장낼 심산이었다.
비록 살인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치 드라마 속 명대사처럼 젊기에 혈기도 왕성한 법이다.
게다가 지금은 두 눈으로 바람 피는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두 남녀는 갑자기 들이닥친 강준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
아까만 해도 몸을 배배 꼬며 애원하던 정다은은 순식간에 동작을 멈췄다.
이내 강준을 발견하자 자기 남자 친구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도 금세 새하얗게 질렸고, 강준에게 손을 흔들며 얼른 나가라고 눈짓했다.
“준아, 여긴 왜 왔어? 맥주병 내려놓고 그만 나가.”
반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강준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인지라 정다은의 비명과 애원이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지금은 오로지 더러운 남녀를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달려들기 직전, 눈앞에 그림자가 아른거리더니 누군가의 발길질에 배를 걷어차였다.
상대방은 시종일관 구석에 앉아 있었지만, 강준은 두 남녀에게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무의식중으로 몸을 구부리는 순간, 날아오는 술병에 콧등과 미간 사이를 가격당했다.
곧이어 뜨거운 피가 얼굴을 적셨고, 사방이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눈앞이 캄캄해지며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고 바닥에 쓰러졌다.
“감히 날 방해해? 어디 한 번 맛 좀 봐!”
정다은과 코스프레하던 남자가 대뜸 일어나 발로 강준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
“그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때, 경비원 연기태가 뛰어와 남자를 힘껏 밀치고 강준을 일으켜 세웠다.
강준의 얼굴은 이미 피범벅이 되었고, 심지어 유리 파편이 살갗에 박혀 차마 직시하기 힘들 정도로 흉측했다.
곧이어 다른 경비원도 우르르 달려와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어쭈? 헌터바는 손님도 때리나 본데?”
강준을 걷어찬 남자가 바지를 주섬주섬 입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안정우는? 당장 튀어오라고 해!”
정다은도 허둥지둥 옷을 껴입었고,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천수 도련님 아니세요? 어쩐지 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했어요.”
이때, 반팔 차림의 중년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뛰어왔다.
이천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담배 한 대를 꺼내더니 깊게 들이마시고 강준을 가리켰다.
“지금 장난해?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 자식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날 때리려고 달려들잖아. 이제 헌터바도 영업하기 싫은가 보네?”
“도련님, 진정하시고 화 좀 푸세요.”
안정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피범벅이 된 강준을 힐긋 쳐다보고 이내 연기태를 향해 말했다.
“뭔데? 이 사람은 또 누구야?”
연기태는 정다은을 힐끗 쳐다보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대표님, 저 여자의 남자 친구입니다.”
정다은은 겁에 질린 나머지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고, 극도의 불안감에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런데 뭐? 누구인지 관심 없거든? 일단 날 방해한 이상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이천수는 건방진 얼굴로 다리를 꼬고 말했다.
안정우는 그제야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남의 업소에서 임자 있는 여자와 거사를 치른 것도 모자라 시비를 따지러 찾아온 남자 친구를 흠씬 두들겨 패기까지 하다니?
안정우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얻어맞은 녀석도 참 운이 지지리 없군. 이천수는 워낙 배경이 막강한지라 심지어 본인조차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존재였다.
“도련님, 일단 때리고 욕하고 할 건 다 했잖아요? 오늘 제가 공짜로 모실 테니까 이쯤에서 관두는 건 어떠세요?”
“내가 돈이 없는 놈처럼 보여?”
이천수가 버럭 외쳤다. 하지만 기분이 좀 풀렸는지 소파에서 일어나 강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않고 함부로 덤벼? 감히 나한테 손찌검하려 들다니? 오늘 네 여자친구랑 끝까지 갈 생각이면 어쩔 건데? 그리고 이따가 계속할 거야.”
“죽여버리겠어!”
강준은 몸부림치며 이천수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하지만 연기태는 그를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하하하, 날 죽인다고? 그럴 배짱은 있어? 멍청한 자식.”
이천수는 욕설을 퍼붓고 정다은을 돌아보았다.
“가자, 이번에는 방 잡아서 즐겨보자고.”
정다은은 흠칫 놀랐고, 안정우와 연기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감히 아무도 찍소리하지 못했다.
강준은 정다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면 그녀는 강준을 외면하고 묵묵히 새로 산 가방을 들고 이천수를 향해 걸어갔다.
“하하하.”
이천수는 콧대가 하늘을 찔렀고, 경멸이 가득한 얼굴로 강준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누군지 모를 것 같아? 경비원 주제에 설치지 마. 코딱지만 한 월급으로 하룻밤 먹고 놀기도 모자랄 것 같은데 똑똑히 얘기할 테니까 잘 들어. 지금부터 정다은은 내 애인이니까 앞으로 계속해서 집적거린다면 두 다리를 문질러 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