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5일 뒤 진시준이 주미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연나은은 그녀의 목에 건 눈부신 목걸이를 발견했다.
연나은은 힐긋 쳐다볼 뿐 곧장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내 생각이 맞았네. 정말 미나 언니한테 주는 목걸이였어.’
진시준의 앞에서 주미나는 항상 연나은에게 살갑게 대한다. 지금도 선뜻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나은아, 며칠 동안 홀로 지내느라 많이 심심했지? 올 때 뭐 좀 많이 사 왔는데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한번 봐봐.”
그녀는 말하면서 외투를 벗고 연나은을 쇼핑백 앞으로 끌어왔다.
연나은이 고개를 내저으며 연신 거절하자 주미나가 탐탁지 않은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됐어. 뭘 새삼스럽게! 틀 차릴 필요 없어. 그냥 예비 숙모가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받아.”
숙모라는 두 글자에 연나은은 저도 몰래 머리를 들었는데 마침 주미나의 어깨에 찍힌 키스 마크가 한눈에 들어왔다. 순간 연나은은 마음이 움찔거렸다.
주미나가 보낸 사진 중 한 장은 호텔 침대를 마주한 사진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연나은은 그녀의 취지를 몰랐다.
그러던 지금 야릇한 키스 마크까지 보게 되자 모든 걸 깨닫고는 시선을 푹 떨군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주미나가 그녀를 위해 선물 박스를 열어주며 오늘 밤에 있을 연회에 관해 이야기했다.
“시준아, 신하윤 씨 성인식 파티에 우리 나은이도 데리고 가자. 두 사람 나이대가 비슷해서 대화가 잘 통할 거야.”
‘파티라니?’
연나은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진씨 저택에 들어오게 된 이후로 진시준은 단 한 번도 연나은을 데리고 그 어떤 연회나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다.
다름이 아니라 늘 몇몇 사람들이 뒤에서 연나은을 기생충이라고 쉬쉬거리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이 남자는 머리를 흔들며 주미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주미나가 그의 팔을 부둥켜안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혼자 가면 지루하니 무조건 연나은과 함께 가고 싶다고 애원했다.
진시준도 더 고집하지 않고 마지못해 그녀의 요구를 들어줬다. 그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주미나를 쳐다보며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연나은은 머리를 숙이고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진시준에게 주미나는 정말 특별한 존재인 듯싶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줄곧 견지해왔던 모든 원칙을 다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
‘삼촌은 미나 언니가 진심으로 좋은가 봐...’
‘하긴, 삼촌만 행복할 수 있다면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더라도 이젠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겠네.’
손님들로 가득 찬 연회장.
연나은은 홀로 구석에 앉아 주미나를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술을 마시는 진시준을 묵묵히 바라보며 주스를 한 모금 삼켰다.
이때 몇몇 여자애들이 웃으며 이리로 다가와 부주의로 연나은에게 와인을 쏟고 연신 사과했다.
그녀는 이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홀로 화장실에 가서 깨끗이 지우려 했다.
떠나기 전, 연나은은 휴대폰과 가방을 진시준에게 넙죽 건넸다.
십분 뒤 다시 돌아오자 진시준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쳐다보며 이상야릇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너희 고모가 방금 전화 와서 시간 있냐길래 너 지금 바쁘다고 했어. 이따가 저녁에 다시 전화 줄 거래.”
고모라는 두 글자에 연나은은 표정이 확 얼어붙었다.
다행히 출국에 관한 얘기는 없었고 그녀도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진시준도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바로 눈치채고 계속 따져 물었다.
“고모랑 언제부터 연락이 닿은 거야?”
“2주 전에 저더러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을 부쳐달라고 해서요.”
연나은은 대충 핑계를 둘러댔고 진시준도 나름 더 의심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몸을 기울이고 헝클어진 주미나의 머리를 자상하게 정리해주었다.
연나은은 휴대폰과 가방을 챙겨서 다시 구석진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누군가가 높이 솟은 샴페인 타워를 건드리자 바로 앞에 있는 연나은과 주미나를 향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심해!”
가까이에 있던 진시준이 고민 없이 주미나를 이끌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더니 품에 꼭 껴안았다.
쾅.
거대한 굉음과 함께 샴페인 타워가 무너졌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던 연나은은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겼고 연나은은 바닥에 쓰러진 채 선홍빛 핏물이 하얀색 이브닝드레스를 빨갛게 물들였다. 그 광경은 보기만 해도 섬뜩할 지경이었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장내에 있던 모든 이가 충격에 휩싸였다. 한편 주미나는 딱히 다친 데도 없지만 놀라서 울음을 터트렸다.
바닥에 쓰러진 채 피범벅이 된 연나은, 충격을 받고 품에 안겨 흐느끼는 주미나, 진시준은 두 여자를 번갈아 보며 잠시 고민하나 싶더니 바로 결정을 내렸다.
“얘 병원에 데려가.”
그는 옆에 있는 경호원에게 분부한 후 주미나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모두가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가운데 연나은이 몸을 휘청거리며 겨우 일어났다.
치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새벽 한 시였다.
오늘 사고로 십여 바늘 꿰맸고 의사가 입원을 제안했지만 연나은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약만 끊고 집에 돌아왔다.
한편 진시준은 아직이었다.
그녀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넋 놓았다.
몸에서 전해지는 따끔거리는 통증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세 시까지 뒤척이고 나서야 겨우 잠들까 싶었는데 갑자기 거실 등이 환하게 켜졌다.
진시준이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위층으로 터벅터벅 올라왔다.
그는 침실이 아니라 한때 그의 서재였던 맨 끝방으로 걸어가 살며시 문을 열었다.
연나은은 깊게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다가 상처를 스쳤는지 꿈결에 몇 번 끙끙거렸다.
나지막한 신음이 마침 진시준의 귀에 닿았다.
그는 목소리를 따라 침대 맡에 다가가 허리를 숙이더니 연나은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한 손으론 그녀의 잠옷을 벗기고 잘록한 허리를 짓눌렀고 다른 손으론 그녀의 턱을 집어 올리더니 그대로 키스를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