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하채원은 온몸의 피가 멎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거절하고 반항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서야 육태준은 진정된 것 같았는데 이때 밖은 날이 어슴푸레 밝아아 오고 있었다.
육태준은 뼈만 앙상한 하채원과 침대 시트에 묻은 붉은 색을 보며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짝!
하채원은 손을 들어 그의 잘생긴 얼굴에 따귀를 매섭게 날렸다.
이 뺨에서 그녀는 사랑에 대한 모든 환상이 깨지는 소리를 듣는 듯했다.
그녀는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육태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끊고 중얼거렸다.
“꺼져요.”
육태준은 어떻게 떠났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온통 어젯밤의 그 장면이었다.
차에 탄 그는 개인 비서 허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채원이 아는 남자를 다 조사해봐.”
허우진은 어리둥절했다.
하채원은 결혼한 후 매일 육태준 주위만 맴돌았는데 어디서 어떤 남자를 만난단 말인가.
...
여관 안.
육태준이 떠난 후 하채원은 자신의 몸을 여러 번 씻었다.
이혼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아침, 9시에 아침 식사를 가져온 차지욱은 하채원의 이상한 점은 눈치채지 못했다.
“어젯밤 깜빡하고 말하지 않았는데 마침 우리 집에 빈방이 하나 있으니 가서 살아도 돼. 여자 혼자 여관에 묵는 건 좀 위험해.”
하채원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인정은 갚기 어렵고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다.
차지욱은 그녀가 거절할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비어 있을 테니 가서 살아. 임대료를 따로 주면 되잖아.”
“하지만 한 달만 살 거야. 한 달이라도 빈방으로 놔두는 것보다는 낫겠지.”
차지욱은 그녀가 왜 한 달만 있겠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앞으로 시간이 많을 거로 생각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차를 몰고 하채원을 데려다주었다.
하채원은 캐리어 하나만 들고 다른 짐은 없었다.
차에 탄 후 차지욱은 하채원과 어릴 적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그녀에게 먼저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외국에 나갔고, 성인이 돼서는 고학으로 공부하여 스무 살 때 창업해 회사를 설립했으며 지금은 꽤 잘나가는 대표님이라고 했다.
하채원은 그의 이력을 들으며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졸업 후, 그녀는 육태준과 결혼하여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녀는 감탄하며 차지욱을 향해 말했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너도 할 수 있어. 네가 마을을 떠난 후에도 난 널 지켜봤어. 네가 TV에 나와서 주니어 피아노 콩쿠르에서 1등을 하는 걸 봤고... 노래도 불렀지? 그땐 네가 나의 여신이었어...”
차지욱은 하채원에게 알리지 않은 일이 있었다.
처음에 그는 혼자 외국에서 공부하느라 생활이 좋지 않았는데 나쁜 짓들을 하며 자포자기했다.
그러다가 언젠가 국내에 있는 하채원이 신문에 실린 것을 보았는데 그 기사들은 한 줄기 빛처럼 그를 비춰 추위를 견디며 천천히 일어서도록 했다.
자신의 찬란한 순간들을 되돌리는 차지욱의 말을 들으며 하채원은 스스로 자신이 맞는지 의심할 지경이었다.
하채원은 자신을 거처로 데려다주고 떠나는 차지욱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예전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을 뻔했어.”
짐을 정리하고 난 하채원은 날짜를 확인했다. 5월 15일, 다시 이혼 신고하러 가는 날까지 불과 십여 일밖에 남지 않았다.
최미영에게 약속한 일을 떠올린 그녀는 아침 일찍 유골함을 사러 갔다.
이어 사진관으로 가 스태프들의 이상한 시선을 받으며 흑백사진도 찍었다.
이 모든 걸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장옥자였다.
“하채원, 누가 몰래 돈을 달라고 했어? 난 이 돈이 필요 없으니 대신 보관해줄게. 나중에 사업이라도 하고 싶을 때...”
지난 몇 년 동안 하채원은 종종 장옥자에게 몰래 돈을 주었다.
시골 사람인 그녀는 돈을 쓸 일이 별로 없었는데 하채원이 준 돈을 전부 모아두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유모의 걱정스러운 잔소리에 하채원의 얼굴에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줌마, 어렸을 때처럼 집에 데려가 주면 안 돼요?”
장옥자가 의심스러워할 때 하채원이 또 입을 열었다.
“15일 날 저를 집으로 데려가 줘요.”
장옥자는 왜 굳이 15일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 15일, 아줌마가 데리러 갈게.”
최근 병원에서는 하채원에게 재검사를 받으라는 문자를 보냈지만 그녀는 적당한 이유로 거절했다.
어차피 떠나기로 했으니 더는 치료비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
계좌를 확인해 보니 아직 2000만 원 남짓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떠난 후 이 돈을 장옥자에게 주어 노후를 잘 보낼 수 있도록 하려 했다.
요즘 단현시는 비가 그칠 줄 몰랐지만 차지욱은 자주 그녀를 보러 왔다.
그녀는 늘 베란다에 혼자 앉아 넋을 잃고 있었는데 차지욱도 하채원의 청력이 나빠진 것을 발견했다. 문을 두드려도 그녀는 듣지 못할 때가 많았으니 말이다.
한편,육진 그룹.
일을 마친 후 육태준은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보았지만 하채원의 문자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때 비서 허우진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말했다.
“대표님, 그 남자 이름이 차지욱이래요. 하채원과 소꿉친구인 것 같아요.”
육태준이 알고 있는 사실이든, 이전 언론 보도든 하채원의 소꿉친구는 줄곧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비서의 말에 따르면 차지욱은 하채원이 시골에 있을 때 알게 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하채원은 차지욱을 먼저 알게 된 것이다.
육태준은 그 사악하고 잘생긴 외모를 가진 남자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표님, 김도영 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육태준은 그 말을 듣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오늘 일이 있다고 해.”
비서는 의아했다.
요즘 대표님은 퇴근 후 김도영과 함께 부잣집 자제들과 어울려 놀곤 했는데 오늘은 왜 일정이 바뀐 건지 알 수 없었다.
육태준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차고로 간 뒤 차를 몰고 하채원이 묵는 여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한 후에야 하채원이 이사한 지 며칠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육태준은 갑자기 짜증이 나서 휴대전화를 꺼내 주소록을 여러 번 켰다 껐다 했다.
하채원에게 전화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배다은이 전화를 걸어왔다.
“무슨 일이야?”
“태준 오빠, 채원 씨 엄마가 그러는데 하채원 씨 결혼 준비를 하고 있대요.”
육태준의 검은 눈동자가 움찔했다.
배다은은 인터뷰를 마친 후 최미영을 찾아갔다가 최미영과 하채원의 동생이 600억을위해 하채원을 늙은이에게 시집보낸다는 걸 알게 됐다.
육태준이 오랫동안 말이 없자 배다은이 또 한마디 했다.
“하채원 씨 엄마 말로는 채원 씨가 예물로 600억을 요구했다는데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이혼 냉정 기간이 지나지 않아 결혼하기 어려우니 먼저 결혼식이라도 올린대요.”
...
하채원은 어머니와 동생이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녀가 한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채원은 최미영으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이 사장님이 날짜를 잡았는데 마침 이번 달 15일이야.]
[아직 4일 남았으니 시집갈 준비 잘해. 이번엔 꼭 남자 마음을 사로잡아야 해. 알겠지?]
하채원은 그 문자 두 통을 보고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15일이면...
가족들이 모여 기뻐하는 날이다...
그리고 육태준과 이혼하기로 약속한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가 시집가도록 강요받은 날이기도 하다...
또 그녀가 떠나기로 한 날이다...
하채원은 또 잊어버릴까 봐 이 일들을 공책에 기록했다.
메모를 다 한 다음 그녀는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펜을 들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했던 그녀는 결국 장옥자와 차지욱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다 쓰고 나서 그녀는 유서를 베개 밑에 넣었다.
3일 후.
14일 이날은 비가 유난히 많이 내렸다.
티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계속 진동했는데 전부 어디 있는지 확인하는 최미영의 전화였다.
내일이면 결혼하는 날이니 집에 돌아가 이씨 가문에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하채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새로 산 베고니아 색의 긴 치마로 갈아입고 화장을 정교하게 했다.
바탕은 나쁘지 않은데 너무 말랐고 얼굴빛이 너무 창백했다.
하채원은 거울에 비친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신을 보며 육태준에게 시집가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묘지로 간 그녀는 우산을 받쳐 들고 차에서 내려 아버지의 묘비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하얀 데이지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아빠.”
찬 바람이 쌩쌩 불고 우산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죄송해요... 여기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전 정말 갈 곳이 없어요. 혼자 외롭게 가는 것이 두려워서 아빠에게 왔다는 걸 인정해요... 욕하실 거면 욕해요.”
하채원은 가볍게 말을 마치고 묘비 옆에 앉아 자신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휴대폰을 켜자 최미영의 악랄한 말이 하나둘 보였다.
[하채원! 피한다고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동생은 이미 돈을 가져갔고, 이 사장은 능력자신데 널 가만 놔둘 것 같아?]
[잘 생각해봐, 내일 얌전하게 시집가는 것이 다른 사람이 찾아내서 묶어서 가는 것보다 나아.]
[주제를 잘 알아야...]
묵묵히 그 문자를 한 통 한 통 다 보고 난 하채원은 천천히 화면을 터치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내일 서교로 데리러 와요. 아빠 묘비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최미영은 하채원의 답장을 받고 별생각 없이 그녀가 자신의 팔자를 인정한 줄 알고 더는 전화하지 않았다.
하채원은 잠시나마 조용한 순간을 누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종일 그곳에 있었다.
어둠이 깔리자 그녀는 어린 시절 아빠가 직접 조각해 준 나무 인형을 꺼내 조심스럽게 품에 안은 채 캄캄한 어둠과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았다.
시간이 1분 1초가 흐르자 멀리서 12시 종이 울렸다.
15일 이날이 드디어 찾아왔다.
하채원은 고개를 들어 끝없이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목이 텁텁하다는 걸 느꼈다.
새벽 3시가 되자 그녀는 손을 떨면서 가방에서 약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