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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하채원이 뉴스를 클릭하자 육진 그룹의 기자 회견 장면이 나타났는데 육태준이 성공적으로 하성 그룹을 인수했다는 내용이었다. 앞으로 이 세상에는 하성 그룹이 없다... ... 하성 그룹 인수로 복수에 성공한 육태준이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이자 김도영이 웃으며 물었다. “3년 전 하씨 가문의 사기 결혼에 관한 업보야.” 말을 하던 김도영은 갑자기 옆에서 일하는 육태준에게 물었다. “태준아, 하채원이 며칠 동안 널 찾으러 안 왔어?” 문서에 사인하던 육태준의 손길이 멈칫했다. 왠지 모르게 요즘 그의 곁에서 하채원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안 왔어.” 육태준의 냉랭한 대답을 들은 김도영은 흠칫 놀랐다. ‘하씨 가문에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도 하채원이 가만히 있었다고?’ 김도영은 계속해서 물었다. “혹시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은 거야? 내가 듣기론 하씨 가문 모자가 찾고 있지만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대.” 옆에서 재잘거리는 김도영을 보며 짜증이 난 육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화를 냈다. “나가!” 어리둥절해진 김도영은 그제야 육태준이 화가 났다는 걸 눈치채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사무실을 떠났다. 밖으로 나온 김도영은 휴대전화를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하채원을 찾았어?” “찾았어요. 서인동의 한 여관에 있어요.” 김도영은 비서에게 위치를 보내라고 한 뒤 차를 몰고 목적지로 향했다. 하채원 때문에 육태준과 배다은이 3년 넘게 헤어지게 됐는데 지금 이혼한다고 해도 조용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배다은은 자신을 구해주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자원봉사를 마친 하채원은 다시 병원에 가서 약을 받은 후 우산을 쓰고 여관으로 향했다. 길에 행인이 적었는데 운전하던 김도영의 시선은 하채원의 가냘픈 뒷모습에 멈추었다. 그는 일부러 차의 속도를 높여 하채원의 옆을 지나가며 그녀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백미러를 통해 하채원이 공허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김도영은 흠칫 놀랐다. 사치스러운 회색 부가티, 하채원은 김도영의 고급 차를 한눈에 알아봤으나 말없이 시선을 거두며 못 본 척했다. 하지만 김도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차 속도를 줄이며 그녀의 뒤를 바싹 따랐다. “하채원 씨, 성깔이 생겼어요? 감히 나를 보고도 못 본 체해요? 예전엔 알랑거리며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굽실거리지 않았어요?” 그의 모욕적인 말을 들었어도 하채원의 마음은 의외로 평온했다. 육태준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를 포함한 주변의 친구들에게도 비위를 맞춰주며 언젠가는 육태준의 친구들과 가족이 자신을 받아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하채원의 착각이었다. 어느 한 파티에서 김도영은 당당하게 자신이 배다은의 친구라고 말하며 배다은을 위해 부잣집 도련님 이미지도 마다하지 않고 하채원을 염치없는 나쁜 년이라고 욕했다. 그리고 하채원을 수영장에 빠뜨리며 죽음으로 내몰았는데 그 이후로 하채원은 그를 피해 다녔다. 하채원이 아무런 반응도 없고 대꾸조차 하지 않자 김도영은 차를 세우고 내려와 급히 그녀 앞으로 다가서며 팔을 꼬집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죠?” 팔이 아파 난 하채원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하채원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김도영은 그녀를 밀쳐버렸다. “더러운 손으로 날 만지지 말아요.” 하채원은 뒷걸음질 치더니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김도영은 믿기 어려운 듯 멍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 여자가 이젠 사기도 치는 거야? 그저 가볍게 밀었을 뿐인데 왜 넘어지는 거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려오자 김도영은 뻘쭘해서 차에 올라타고는 떠나기 전에 악담을 퍼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채원 씨, 장애인이라고 해서 다은이를 괴롭힐 생각하지 마세요. 다은이는 당신과 달리 엄청난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다은이와 태준이를 방해하지 말아요.” 차가 떠나나 후 그는 하채원의 현재 거처를 하씨 가문에 알렸다. 바닥에 넘어져 손과 무릎이 까진 하채원은 아파서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사실 시비를 구분할 줄 모르는 김도영을 보며 하채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4년 전에 김도영을 폭발 직전의 차 안에서 끌어낼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앞을 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제가 꼭 보답할게요.” 이것이 바로 그의 보답인가? 돌아간 후 목욕을 하고 다친 곳에 약을 바른 하채원은 흐리멍덩해져 침대에 누웠다. 오늘 일을 통해 그녀는 육태준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날이 어슴푸레 밝았다.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보니 마침 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최미영이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하채원이 깨어난 것을 보고도 최미영은 걱정 한마디 없이 그저 테이블에 놓인 문서를 건네주었다. “잘 읽어봐. 엄마가 너에게 주는 뒷길이야.” 문서를 받아보니 그 위에는 ‘결혼 합의서’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하채원은 문서를 열어봤다. [... 하채원 씨는 자진해서 이용준 님의 아내로 되며 떠나지 않고 평생 돌볼 것을 맹세한다...] [이용준 님은 하채원 씨의 친정, 즉 하씨 가문의 앞으로의 생활을 보장해야 하며 600억 자금을 제공한다...] 이용준은 단현시의 오래된 기업가이며 현재 78세 고령이다. 하채원의 신경이 팽팽해질 무렵 최미영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사장은 네가 재혼한 걸 개의치 않으니 시집가기만 하면 하씨 가문이 재기하도록 돕겠다고 했어. 착한 우리 딸, 엄마와 동생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지?” 하채원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저는 동의할 수 없어요.” 하채원이 거절할 줄 몰랐던 최미영은 버럭 화를 냈다. “네가 뭔데 거절해? 네 목숨은 내가 준 거야.” 이 말을 들은 하채원은 최미영을 마주보며 또박또박 물었다. “그럼 제가 목숨을 돌려드리면 되나요?” 최미영은 다시 멍해졌다. “뭐라고?” 하채원은 핏기 없는 입술을 감빨며 말했다. “만약 제가 목숨을 돌려드리면 당신은 더는 저의 엄마가 아니니 저를 낳아준 은혜를 갚지 않아도 되죠?” 최미영은 믿지 않은 표정으로 쌀쌀하게 말했다. “그래, 목숨을 돌려준다면 더는 강요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 그럴 용기 있어?” 하채원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한 달만 시간을 주세요.” 최미영은 갑자기 하채원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으로 날 위협할 생각하지 마. 넌 널 애틋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죽으면 그만이야. 죽지 못하겠으면 이 문서에 사인해.”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인 하채원은 클럽에 가서 구석에 앉은 채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때 부리부리한 두 눈을 가진 잘생긴 남자가 홀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앞으로 다가왔다. “혹시 하채원 아니야?” 그를 알아보지 못한 하채원은 멍하니 쳐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즐거워지는지 알아?” 남자는 잘 듣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물었다. “뭐라고?” 하채원은 술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병에 걸렸으니 항상 기분이 좋아야 한다고 했는데 난... 즐겁지가 않아...” 이 말을 들은 차지욱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날 몰라보는 거야? 그리고 병이라니? 무슨 병이길래 기분 좋아야 하지?’ “아가씨, 즐거워지고 싶으면 이런 곳에 오는 게 아니야.집에 데려다줄게.” 차지욱이 부드럽게 말하자 하채원은 웃음을 머금고 바라봤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차욱은 하채원의 씁쓸한 미소를 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지난 몇 년 동안 무슨 일을 겪었던 거지?’ 차지욱은 왠지 슬퍼졌다. 같은 시간, 육태준도 이 클럽에 있었다. 지난번 하채원과 구청에서 이혼 신고를 한 후로 그는 밤마다 클럽에 와서 놀며 오랫동안 대산 별장에 돌아가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모두 떠나려고 할 때 배다은은 구석에 있는 익숙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하채원 아니에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한 남자와 웃으며 대화하는 하채원을 본 육태준은 순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야밤에 클럽에서 술만 마신 게 아니라 남자도 찾았어? 내가 잘못 봤군.’ “태준 오빠, 다가가서 물어봐야 해요?” 배다은이 물었다. “그럴 필요 없어.” 육태준은 쌀쌀하게 대꾸하며 재빨리 클럽을 떠났다. 같은 시각, 하채원은 배웅하겠다는 차지욱의 호의를 거절했다. “혼자 돌아갈 수 있어.” “하채원, 정말 내가 누군지 기억 안 나?” 하채원은 다시 힐끗 쳐다봤지만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뚱이야. 기억 안 나?” 차지욱이 귀띔하자 그제야 하지원은 어릴 때 장옥자와 함께 시골에 살 때 알게 된 친구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때 차지욱은 뚱뚱했고 하채원보다 키가 작았는데 이젠 190cm에 달하는 키에 이목구비도 수려해졌다. “생각났어. 많이 변해서 못 알아봤어.” 여기서 어릴 적 시골 친구를 만난 건 너무 기쁜 일이었다. 억지로 웃음을 짜내는 하채원을 보며 차지욱은 마음 한구석이 섭섭해졌다. “가자, 집까지 바래다줄게.” 하채원을 바래다주며 그는 그녀가 허름하기 짝이 없는 모텔에 묵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채원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웃음거리가 됐네. 내가 여기서 산다는 걸 아줌마에게 말하지 마. 걱정할 거야.” 차지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늦은 밤이라 오래 머물러 있기 불편했던 차지욱은 내일 다시 보러오겠다고 약속하며 떠났다, 여관을 나선 차지욱은 어두운 곳에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걸 몰랐다. 술을 많이 마신 하채원은 속이 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턱턱턱.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차지욱이 다시 돌아온 줄 알고 일어나서 문을 연 하채원은 뜻밖에도 육태준이 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채원을 본 육태준은 손목을 덥석 움켜잡았는데 힘이 너무 세서 가느다란 팔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하채원! 다시 보게 되네.” 육태준은 손을 뒤로 뻗어 문을 닫고는 그녀를 소파로 끌고 갔다. “벌써 다른 남자를 찾았어? 어쩐지 나를 쉽게 놔준다고 했어.” 비아냥거리는 육태준의 말투는 비수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가 왜 왔는지, 또 어떻게 차지욱을 만나게 되었는지 하채원은 알 수 없었다. 멍해졌던 하채원은 설명하지 않고 화를 내는 육태준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둘 별 다르진 않아요.” 하씨가문에서는 결혼을 사기 쳤고 육태준은 3년간 그녀를 차갑게 대했을뿐더러 첫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누가 더 고상하다고 비교할 것도 없었다. 오늘 술을 마셔서인지 육태준의 몸에서 술 냄새가 났다. 두 눈이 충혈된 그는 하채원의 턱을 잡으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 자식 누구야? 언제부터 알았어?” 이런 육태준을 처음 본 하채원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질투하는 거예요?” 육태준은 눈빛이 어두워진 채 비아냥거렸다. “네 딴 게 뭐라고?” 하채원은 목이 메었다. 육태준은 갑자기 그녀에게 덮치더니 귓가에 대고 물었다. “그 자식이랑 예전에 이미 잔 거 아니야?” 3년 전에 결혼한 후 육씨 가문의 뜻에 따라 하채원은 일을 그만뒀고 친구들의 초대도 거절했다. 하지만 지금 육태준이 이런 의심을 하고 있다니... 갑자기 마음이 풀린 하채원이 되물었다. “글쎄요?” 갑자기 화가 난 육태준은 뜨거운 손길을 아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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