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하채원은 너무 무서워서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한참을 지나서야 모든 게 끝났다.
“채원아, 날 화내게 하지 마.”
육태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슴푸레 이 말만 듣고 있는 하채원의 두 눈은 초점을 잃었다.
“날 영원히 만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이건 뭐죠?”
하채원이 얼굴을 베개에 파묻다 보니 육태준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당신이 이런 짓을 한다는 걸 당신 애인이 알아요? 알게 된다면 화낼 거예요.”
예전에 하채원은 육태준이 매정한 것 같지만 또 정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육태준은 나쁜 놈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육태준의 애인이라면...
육태준은 당연히 그녀가 배다은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지욱과 함께 있을 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어?”
이 말은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저격했다.
육태준은 여자를 위해 자신을 난감하게 한 적이 없다. 하물며 상대는 하채원이니 더더욱 그럴 일이 없다.
“당신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또 있을 줄 몰랐어.”
이 말을 할 때 그는 이미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하채원은 귀가 윙윙거렸는데 하체에서 뭔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육태준이 떠나기 전에 하채원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태준 씨, 궁금한 게 있어요. 제가 죽는다면 슬퍼할 건가요?”
‘죽는다고?’
육태준은 그저 우스울 뿐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 대산으로 돌아와.”
하채원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육태준이 떠난 후 이불을 젖히자 다리 사이에는 피가 흥건했다.
육태준은 자신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채원의 집 밑에 구급차가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음날.
병원.
하채원은 병상에 기대어 있었고 옆에서 차지욱이 돌봐주었다.
어젯밤 제때 병원에 실려 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아이를 잃었을 것이다,
이 일을 통해 하채원은 육태준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딩동.
휴대전화를 가져다 보니 이미 해외로 도주한 최미영이 보내온 문자였다.
[채원아, 살아있다면 엄마를 도와 이 사장님을 달래줘. 엄마와 천우가 너에게 고마워할 거야.]
하채원은 문자를 삭제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하채원은 자신이 살아있는 한 그 모자가 끊임없이 요구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때 또 다른 문자가 왔는데 육태준의 어머니, 고설희가 보내온 것이었다.
[채원아, 우리 태준이가 널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 태준이가 너와 이혼하지 않는 이유가 널 괴롭히기 위해서야. 그래서 말인데, 너 이 세상에서 사라져주면 안 돼? 부탁할게.]
뒤에서 걸어오던 차지욱이 마침 이 문자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람들은 정말 파렴치하기 그지없어.”
하채원은 휴대전화를 끄고 그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사람도 있잖아. 고마워.”
차지욱은 억지 웃음을 짓는 하채원을 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지난 몇 년 동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불공평함을 겪은 거야? 왜 소꿉친구를 대할 때도 여전히 조심스러워 하는 거야?’
차지욱은 앞에 앉아 차분하게 그녀를 마주 봤다.
“친구끼리는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할 필요가 없어.”
이 말을 들은 하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하채원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욱아, 좀 도와줄 수 있어?”
하채원은 지금의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차지욱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대산 별장.
육태준은 오늘 퇴근 후 일찍이 돌아왔다.
하채원이 화를 풀고 돌아왔을 줄 알았는데 문을 열어보니 칠흑 같은 적막이 한순간에 온몸을 감쌌다.
육태준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자기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업무에 관련된 문자 외에 다른 문자가 없었다.
육태준은 답답해서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소파에 앉았다.
왠지 그는 머리가 아파 났다.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미간을 문지르던 그는 눈을 감자마자 하채원의 평온한 얼굴이 떠올랐다.
평온하다고 해서 평범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채원은 빛날 정도로 예뻤다.
육태준은 여전히 하채원을 처음 본 그날을 기억했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은 그녀는 수줍게 웃었지만 눈빛이 밝게 빛났는데 더없이 아름다웠다.
육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문득 하채원이 자신에게 시집온 후 더는 웃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전화 벨소리가 그를 깨웠는데 전화를 받아보니 친구 김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준아, 하채원이 큰일 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