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강아영은 결국 ‘오빠’란 단어를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관계에 절망을 느끼긴 했지만 아직도 그녀는 서지훈을 사랑하고 있었다.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아도 그저 함께면 기분이 좋을 정도로 그녀는 서지훈이 좋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날 사랑하지 않는 걸까?’
이미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그 여자 때문에 서지훈은 강아영에 대해 알아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뭐 다른 의미로는 그가 존경스럽기도 했다.
원나잇식 사랑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 그 같은 일편단심 순정남은 보기 드문 존재이니 말이다.
이지원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남자 보는 눈은 확실하다 싶었다.
그래서 더 이상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악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브로치는 언제든지 가지러 와. 내가 따로 보내도 되고.”
“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강아영은 3년간 처음으로 홀가분하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괜찮은 여자니 언젠가 날 보석처럼 아껴주는 남자가 나타날 것이라 강아영은 믿었다.
...
한편, 이지원이 또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갔다는 소식을 들은 김선애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걔는 정말... 아무리 봐도 아영이 반도 못 따라가는데 서지훈 그 자식은 도대체 뭐에 홀린 거야. 아영이 얼굴에 성격에 딱 봐도 지훈이 스타일인데. 도대체 뭐가 문제지?”
“엄마, 그만하세요. 저 아영이랑 얘기 끝냈습니다.”
완전히 녹초가 된 신지한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서지훈은 새벽 3시가 되어서도 깨어있는 부모님을 발견하곤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끝냈는데?”
“시차 적응만 끝내면 바로 이혼 수속 밟을 겁니다.”
타이를 풀어헤친 서지훈이 소파에 앉았다.
“아영이도 그렇게 하겠대?”
김선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아까 집까지 데려다줬는데 저랑 지원이 사이 축복까지 해주던데요. 엄마 소원대로 저랑 아영이 이제 남매가 되었어요.”
두 사람이 정말 합의를 끝냈다는 말에 김선애는 꽤 당황스러웠다.
“꽃 같은 나이에 시집와서 3년 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지냈어. 그런데 이렇게 그냥 이혼을 한다고? 너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네.”
단호한 태도에 말문이 막힌 김선애는 남편의 옷자락을 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와중에도 핀잔을 주는 건 잊지 않았다.
“그 착한 아영이를 내버려두고 굳이 왜 걔한테 집착하는 건지. 눈을 고치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
연속 이틀째 밤을 꼴딱 세운 강아영이 눈을 떴을 땐 이미 오후가 된 뒤였다.
음식 냄새를 맡고 거실로 나가보니 친구 안지은의 모습이 보였다.
주방 어귀의 벽에 기댄 강아영이 웃으며 물었다.
“우렁각시님, 안녕하세요.”
“우리 공주마마, 얼른 씻고 식사하셔야죠??”
고개를 끄덕인 강아영은 빠르게 세수를 마치고 식탁 앞에 앉았다.
워낙 배고프던 터라 허겁지겁 먹던 그녀가 물었다.
“너 은산시로 촬영간 거 아니었어?”
“너희 시어머니께서 너 걱정된다면서 다시 부르셨어.”
안지은이 국을 떠주며 물었다.
“너 지훈 씨랑 정말 헤어지려고?”
“응.”
“6년을 좋아했는데 끝이 겨우 이거야?”
안지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히 너 아니었으면 서지훈 그 자식 진작 죽었어.”
본인보다 더 흥분한 친구를 보며 강아영은 피식 웃었다.
“솔직히 나도 지칠 만 하잖아? 그리고 아직도 그렇게 이지원을 사랑하는 모습에 좀 감동했어.”
“감동? 그럼 넌? 넌 어렸을 때부터... 휴, 정말 괜찮겠어?”
“다른 건 괜찮은데 어머님이 좀 마음에 걸리네.”
강아영이 어깨를 으쓱하자 안지은 역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네가 뭐가 모자라서 한 남자한테 그렇게 목을 메니. 이 세상엔 서지훈보다 좋은 남자 널렸어. 오늘 저녁에 나랑 나가자. 내가 좋은 애들로 소개해 줄게.”
“그래. 난 잘생긴 남자가 좋아.”
그녀가 대답을 마치자마자 김선애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저녁은 본가에서 먹으며 재산 분할에 대해 의논한다는 내용이었다.
식사 후, 강아영은 김선애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사 들고 서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
거실로 들어가 보니 시부모님을 제외하고 변호사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아영아, 그 자식 좀 데리고 와.”
김선애가 말했다.
“네.”
2층으로 올라간 강아영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방에 아무도 없어 서재로 가려던 찰나,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욕실에서 나오는 서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물기가 촉촉한 몸에 항상 깔끔하게 올리던 앞머리는 이마를 덮고 있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어깨에 떨어지며 탄탄한 라인의 가슴, 복근을 따라 허리에 둘러맨 욕실 타올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