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서우다!’
강하성은 차에 앉아 온몸의 피가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손이 벌벌 떨려 몇 번 시도한 끝에 드디어 차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리자 임서우가 차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잔뜩 움츠린 채 한쪽 다리를 부둥켜 안고 미간을 찡그리며 두려움에 가득 찬 눈길로 강하성을 쳐다봤다.
다행히 피는 안 흘렸다.
“서우 너 미쳤어?”
강하성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돈 갖고 싶어서 미친 거냐고?”
“얼마면 돼? 200억? 400억? 아니면 2000억 줄까?”
“말해. 주면 될 거 아니야.”
그는 줄곧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어찌 감히?
죽는시늉은 한 번이면 족하지 강하성이 두 번 속을 리 있을까?
그는 임서우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라고요...”
임서우는 무기력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강하성의 이런 모습을 전혀 본 적이 없었다.
“하성 씨한테 돈 받을 생각 한 적 없어요. 단 한 번도요.”
그녀는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그 메시지를 찾아낸 후 강하성에게 보여줬다.
“난 그저... 하성 씨를 예지 언니한테 돌려주고 싶을 뿐이에요.”
강하성은 휴대폰을 가져와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서우야, 1년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하성이 잊을 수 없어. 인제 그만 돌아가고 싶어. 하성이 나한테 돌려줄래?]
사촌 언니 임예지가 보낸 메시지였다.
강하성은 휴대폰을 꽉 잡았다.
시선을 옮기자 임서우가 어느새 아파서 기절했다.
“귀찮게 구네!”
강하성은 재빨리 그녀를 안아서 차에 태운 후 병원으로 질주했다.
임서우는 다시 깨어나 보니 어느덧 병원에 와 있었다.
어렴풋이 눈을 뜨자 옆에서 한은실이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임서우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걱정 마. 아무 문제 없어.”
“넌 그냥 시름 놓고 돌아오기만 하면 돼. 다들 너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데.”
“너...”
한은실은 머리를 돌리고 한창 자신을 바라보는 임서우와 눈이 마주쳤다.
“알겠으니까 이만 끊어. 돌아오거든 만나서 다시 얘기해.”
그녀는 곧장 전화를 끊고 얼굴에 띈 미소도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
“누구예요?”
임서우는 몹시 궁금했다.
“엄마 방금 누구랑 통화했어요?”
“네가 알 바 아니야.”
한은실은 행여나 임서우가 뺏을까 봐 휴대폰을 거둬들였다.
임서우의 마음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임예지에요?”
“신경 끄라고 했잖아. 네 몸이나 챙겨.”
한은실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다리 다 나았어? 그냥 확 치어 죽어버리지 그랬어?”
임서우는 울화가 치밀었지만 머리는 유난히 맑았다.
한은실은 강하성에게 약을 탄 후 그와 임서우를 이혼시키려 했다. 혹시 임예지가 돌아오는 것 때문에?
여기까지 생각한 임서우는 심장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하성 씨한테 약 타서 1년 전 일을 떠올리게 하고 날 더 증오하게 만든 이유가 임예지 때문이란 거네요?”
한은실은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곧바로 험한 말을 내뱉었다.
“너 진짜 뻔뻔스럽게 왜 그래? 예지가 돌아오는 걸 뻔히 알면서 강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싶어?”
그녀는 시큰둥하게 냉소를 터트렸다.
“이제 곧 쫓겨날 걸 알고 일부러 하성이더러 네 다리를 다치게 한 거지? 그럼 하성이가 죄책감에 마음 약해져서 이혼 안 할 것 같아?”
역시 이랬다.
임서우는 분노가 극에 달하니 되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좋아, 아주 좋아.’
한은실이 한사코 그녀더러 임예지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하면 그녀는 더더욱 삐딱하게 나오며 한은실을 괴롭힐 것이다.
“맞아요. 방금 한 말 전부 다 맞아요.”
임서우가 보복한다는 식으로 씩 웃었다.
“내가 왜 사모님 자리를 내줘야 하는데요? 절대 임예지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 거예요. 이제 만족해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강하성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손에 저녁 식사를 들고 있는 저 자신이 한없이 우스웠다.
‘내가 바보 멍청이라서 임서우한테 이런 식으로 자꾸 농락당하는 거야.’
임서우 이 여자는 사악하다 못해 엄마한테까지 증오를 당하고 있다. 모든 게 그녀의 자업자득이다.
강하성은 저녁 식사를 바닥에 내던지고 가차 없이 짓밟아버린 후 차가운 시선으로 임서우를 쳐다봤다.
“이혼합의서에 사인하는 대로 보내올게!”
이런 여자와는 하루만 더 결혼 생활을 이어가도 그에게 굴욕으로 남을 것이다.
강하성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임서우는 방금 엄마한테 보복한다 치고 막말을 내뱉은 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한편 한은실은 옆에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나랑 임예지 중에 대체 누가 엄마 딸이에요?”
그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한은실은 그런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나도 예지처럼 똑똑하고 예쁜 딸을 갖고 싶은데 아쉽게도 그런 복이 없네.”
“꺼져요!”
임서우는 옆에 놓인 베개를 확 뿌리쳤다.
“미쳤어?”
한은실이 버럭 화냈다.
“이젠 엄마까지 때려? 넌 인간도 아니야!”
“당신은 엄마 될 자격이 있어요? 꺼져요 얼른. 눈꼴사나우니까.”
임서우는 또다시 책상 위의 물건을 집어 던졌다. 그녀는 정말 한은실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간다. 나라고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한은실은 가방을 챙기고 문 앞에서 두 눈을 희번덕거린 후 엉덩이를 비틀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강하성이 직접 알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천한 년 따위 보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임서우는 마음이 재가 되어 다시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김은아가 어젯밤에 전화를 여러 번 했고 나중에 카톡도 몇 개 보냈다.
그녀는 임서우가 후회하고 다시 강씨 가문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
임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당분간 임씨 가문에서 지낼 거라고 말했다.
다리의 상처가 다 나은 후에 다시 김은아를 찾아갈 예정이었다. 괜히 그녀가 걱정할까 봐.
임서우는 홀로 외롭게 병원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이른 아침 눈을 뜨자 뜻밖에도 임예지가 떡하니 나타났다.
1년 만에 본 임예지는 전보다 더 예뻐졌다.
애쉬톤의 웨이브 머리에 티 없이 완벽한 메이크업, 깔끔하게 컷팅 된 투피스와 기본굽 8센티의 하이힐을 착장하고 있었다.
출국 전 남루했던 몰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또다시 모두가 부러워하는 임씨 가문 공주님으로 돌아왔다.
임예지는 임서우의 사촌 언니이다.
둘은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는데 소문에 의하면 임예지는 임서우보다 고작 한 시간 더 빨리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둘의 인생은 천지 차별을 이뤘다.
임예지의 아빠는 임씨 가문의 세대주이고 LS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겸손하고 온순하며 아주 너그러운 분이시다.
한편 임서우의 아빠는 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인데 술과 도박을 즐기고 종일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반년 전에 과음으로 사망했다.
임예지의 엄마는 임서우가 꿈에 그리던 엄마의 이미지를 모두 지녔다. 온화하고 아름다우며 임서우를 볼 때마다 나지막이 ‘서우야’라고 불러준다.
그녀는 임서우에게 밥은 먹었는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지 여쭸었다.
또한 우리 서우는 장차 유명한 화가가 될 거라고 자주 말했었다.
하지만 임서우의 엄마는... 번마다 그녀의 그림을 갈기갈기 찢으며 화가는 꿈도 꾸지 말라고, 그녀의 그림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윽박질렀다.
“서우야?”
임예지가 그녀 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왜? 나 모르겠어? 네 언니잖아.”
임서우는 눈물을 대충 닦으며 말했다.
“언니, 드디어 돌아왔네.”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숙이고 감히 임예지를 마주 보지 못했다.
그해 그 일이 있고 난 뒤 임서우는 늘 임예지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만나주질 않았다.
다시 만난 지금 임서우는 그녀를 마주 볼 면목이 없다.
하지만 임예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자를 가져와서 침대 옆에 앉았다.
“하성이가 부주의로 네 다리를 다치게 했다며? 이제 좀 괜찮아? 내가 대신 사과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