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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옆에서 지켜보는 김은아도 이렇게 힘든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임서우는 강하성을 6년 동안 사랑했고 1년이란 결혼 생활을 함께 보냈다. 7년이란 긴 시간 동안 그녀에게 차려진 건 대체 뭘까? 자신을 향한 강하성의 야유와 무관심? 이 모든 걸 진작 끝냈어야 했다. 임서우는 눈물을 닦고 김은아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네 말이 맞아. 7년이면 인간은 온몸의 세포가 한 번 싹 바뀐다는데 내가 뭣 하러 강하성 잊지 못해서 끙끙 앓겠어?”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본인의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어진 며칠 동안 임서우는 휴대폰을 꺼두고 외부와의 왕래를 일절 차단한 채 오직 그림에만 전념했다. 드디어 월요일이 다가오고 그녀도 ‘첫사랑’ 테마의 드레스를 한 벌 디자인해냈다. 임서우는 이 설계도를 가지고 회사로 가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 한 번 더 쟁취해보고 싶었다. 회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도 임예지와 마주쳤다. “여긴 어쩐 일이야?” 임예지는 그녀를 한쪽 옆으로 끌고 갔다. “네 일에 관해서 임원 층 의견을 쟁취하는 중이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일단 돌아가서 연락 기다려.” “언니.” 임서우는 손에 화첩을 들고 있었다. “내가 드레스를 몇 벌 디자인했어. 매니저님께 보여드리고 싶어.” “그래?” 임예지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근데 어떡하지? 매니저님 출장 가셨어. 내일 오후에나 돌아오실 거야.” 그녀는 임서우의 품에 있는 화첩을 바라봤다. “내가 먼저 한 번 봐줄까?” 임서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잘 부탁해 언니.” 그녀는 그림을 넙죽 건넸다. 임예지는 쭉 훑어보며 말했다. “너무 괜찮네. 돌아가서 세세한 부분을 좀 더 수정하면 매니저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야.” “다행이네.” 임서우는 무척 기뻤다. “고마워, 언니. 나 그럼 수요일에 다시 올게.” “알았어. 나 먼저 일하러 가.” 임예지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임서우는 화첩을 안고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의 눈가에 의미심장한 빛이 감돌았다. 곧이어 임서우도 자리를 떠났다. 월세방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이 일을 김은아에게 전했다. “그 설계도를 임예지한테 보여줬다고?” 김은아는 그녀가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응.” 임서우는 머리를 끄덕였다. “서우야...” 김은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네가 임예지를 많이 믿고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녀는 결국 나지막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됐다. 정말 내가 괜한 생각한 것일 수도 있잖아.” 다음날 점심, 김은아가 또다시 임서우를 다그쳤다. “서우야, 너희 매니저님 오늘 오후에 돌아오신다고 하지 않았어? 내일까지 기다릴 거 없고 지금 바로 회사로 찾아가 봐.” 시간이 길어지면 불안 요소도 커지는 법이니까. 한편 임서우는 출발할 기미가 없고 오히려 휴대폰으로 그 몇 장의 설계도를 찍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일단 사진 찍어서 매니저님께 보내드리려고.” “그것도 좋지.” 김은아는 찬성한다는 듯 그녀 옆에 앉으며 말했다. “네가 요 며칠 꼬박 밤을 새워서 그린 그림이라고 말씀드려. 이 기회를 소중히...” 다만 임서우가 머리를 내저으며 다 작성한 카톡을 김은아에게 보여줬다. 김은아는 흠칫 놀라더니 그녀의 뜻을 바로 알아챘다. 둘은 서로 통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서 임서우가 카톡을 전송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늘 길게만 느껴지는 법, 저녁 무렵이 돼서야 이연아의 답장이 도착했다. [봤어요. 이건 임 팀장님이 디자인한 ‘사랑의 의미’잖아요. 너무 괜찮아서 다음 시즌 메인 프로모션으로 쓰고 싶은데 팀장님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좀 더 수정하겠다고 했어요.] 이 문자를 본 임서우는 저도 몰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옆에 있는 김은아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김은아는 순간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임예지처럼 뻔뻔스러운 인간한테는 나라에서 상을 줘야 해. 이건 정말 파렴치함의 극치야!” “와,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토록 뻔뻔스러울 수가 있지? 리스펙이야 진짜.” 점심때 임서우가 이연아에게 보낸 카톡 내용은 바로 이거였다. [매니저님, 이 설계도 보신 적 있나요?] 그러니까 임예지는 그날 임서우의 설계도를 보자마자 돌아가 원고를 본떠서 한발 앞서 이연아에게 보여준 것이다. “서우야!” 김은아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수년간 임서우는 줄곧 임예지의 그늘서 지내왔다. 특히 최근 1년 동안 임서우는 피해자이면서도 늘 임예지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임예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하고 있다는 걸 설명한다. 임서우는 김은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은아야, 생일 파티하던 날에 진짜 우리 엄마랑 임예지가 짜고 쳐서 그 사달을 벌인 게 아닐까?” 그날 임서우를 귀빈실로 보낸 것도 임예지이고 그 안에 강하성이 있는 걸 아는 사람도 임예지 뿐이었으니. 김은아는 좀처럼 대답하기 힘들었고 심지어 감히 더 깊게 생각할 엄두가 안 났다. 만약 그녀의 엄마가 사촌 언니랑 손을 맞잡고 그녀를 딴 남자의 침대에 기어오르게 한다면... 이는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한 일이다! “일단 진정해 서우야.” 김은아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어떤 일은 앞뒤가 안 맞아. 임예지는 그토록 강하성에게 시집가지 못해서 안달인데 걔가 그렇게 할 이유가 없잖아!” 임서우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 그 당시 강하성과 결혼할 수 없다거나 혹은 반드시 떠나야 한다거나, 그런 경우는 없을까?” “그럼 왜 너야?” 김은아는 모든 게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임서우는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지금 반드시 임씨 가문으로 찾아가야만 한다. 한은실에게 그해 일을 똑똑히 물어봐야 한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이다. “서우야 진정해. 지금 너희 엄마랑 임예지가 같은 편이야. 그해 일이 정말 임예지랑 관련이 있어도 너희 엄마는 절대 너한테 안 알려줘.” 김은아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물어본다고 해도 직접 물어보면 안 돼. 생각 잘하고 물어봐야 해.” 임서우는 머리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길에서 그해 벌어진 일이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임예지의 생일날, 성수시의 수많은 명문가를 초대하여 거창하게 파티를 올렸다. 임서우가 기억하기로 그날은 한은실이 그녀를 파티에 데려갔고 음료수도 한은실이 건넸다. 음료수를 다 마신 후 임서우는 온몸이 불편했고 이때 마침 임예지가 나타나더니 그녀를 귀빈실로 데려갔다. 안에 들어서자 강하성이 보였는데 충혈된 두 눈이 살짝 부자연스러웠다. 한참 뒤 임예지가 뛰쳐 들어왔을 때 임서우는 강하성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은실이 다짜고짜 들어와서 그녀를 때렸고 강하성도 버럭 화내며 그녀더러 꺼지라고 했다. 하룻밤 사이에 임서우는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나중에 어떻게 해명하든 아무도 그녀를 안 믿었다. 한은실은 그녀가 파렴치하다고 욕했고 강하성은 그녀가 약아빠졌다고 욕했으며 임예지도 그녀를 만나길 거부했다... 다만 임서우는 정작 아무것도 안 했다. 만약 이 모든 게 임예지와 한은실이 연합해서 벌인 짓이라면 나름대로 모든 실마리가 풀린다. 하지만 대체 왜? 김은아의 말처럼 왜 그녀였을까? 임씨 가문 대문 입구에 도착한 임서우는 임예지의 신발을 발견했다. 가정부가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아가씨도 마침 오셨네요.” “언니 왔어요?” “네. 예지 아가씨는 사모님과 함께 서재에서 얘기 나누고 계세요.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괜찮아요. 저 그 사람들 찾으러 안 가요. 챙길 물건이 있어서 방으로 가볼게요.” 임서우는 고개를 들어 서재 방향을 보더니 왠지 모르게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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