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임서우는 곧장 HU 그룹 맨 위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강하성과 서로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그날 밤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라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색해졌다.
강하성이 먼저 시선을 피하고 계속 책상 위의 서류를 훑어보았다.
“브레인에서 근무 시간이 엄청 자유롭나 봐?”
임서우는 잠깐 어리둥절해 있다가 뒤늦게 알아챘다. 강하성은 지금 그녀에게 왜 출근하지 않았냐고 묻고 있었다.
“일이 좀 생겨서 이제 곧 잘릴 것 같아요.”
강하성은 역시 이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피식 웃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가느다란 눈으로 차분하게 임서우를 쳐다봤다.
“후회돼? 이젠 빈몸으로 나앉고 싶지 않은 거야?”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가 이혼합의서 내용을 수정하기 위해서였네!’
“아니요.”
임서우는 이 남자의 이런 태도가 정말 너무 싫었다.
그녀가 진짜 돈을 밝혔다면 뭣 하러 1년이나 공짜 가정부로 지냈겠는가!
“하성 씨랑 결혼한 1년 동안 난 아무런 이득도 못 얻었어요. 말은 똑바로 해야죠.”
“그래?”
강하성의 눈동자에 야유가 더 짙어졌다.
“그럼 너희 엄마는?”
“...”
임서우는 할 말이 없었다.
1년 동안 한은실은 강씨 가문에서 적잖은 돈을 챙겨갔다. 하지만 이 돈들은 그녀와 일절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둘은 모녀 사이였으니 임서우는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강하성에게 물었다.
“얼만데요? 엄마가 얼마나 가져갔어요? 내가 나중에 갚을게요.”
“갚는다고?”
강하성은 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적어도 20억인데 네가 뭐로 갚아?”
20억이라니?
임서우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 딴에는 최대한 4억 좌우일 거라고 여겼다.
강씨 가문도 참 통 큰 집안이지. 아니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한은실에게 20억이나 내준 걸까?
혹시 강하성과 임예지가 결혼하면 한은실은 더 많은 돈을 얻게 되는 걸까?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강하성은 그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못 믿겠으면 육정인 찾아가서 이체 기록 확인해봐.”
“믿어요.”
임서우는 그가 이딴 거짓말은 안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 언제 갚을 거야?”
강하성이 또다시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봤다.
임서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최대한 빨리 갚을게요.”
강하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임서우가 갚을 수 없다는 걸 그는 너무 잘 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질문을 툭 건넸다.
“약은 먹었어?”
“약이라니요?”
임서우는 어리둥절해졌다.
강하성은 사인을 멈추고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날 밤 이후에 약 먹었냐고?”
그날 밤?!
임서우는 곧바로 알아챘다. 그러니까 그날 밤 관계를 가진 이후로 피임약을 먹었는지 묻고 있는 것이었다.
하긴, 두 사람은 이제 곧 이혼할 예정이니 이 타이밍에 임신하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겠지!
아쉽게도 강하성이 괜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진작 약 먹었으니까.”
강하성은 펜을 쥔 손에 저도 몰래 힘이 살짝 들어갔다.
“센스는 있네. 경고하는데 다른 수작 부리지 마. 네가 설사 임신해도 인정해주지 않아.”
임서우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두 귀로 절실히 들으니 여전히 차오르는 슬픔을 자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심호흡하고 나서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 말아요. 나도 짐 덩어리를 안고 이혼하고 싶진 않으니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강하성의 손에 쥔 펜이 바닥에 떨어졌다.
임서우는 깜짝 놀라더니 어쩔 바를 몰라 하며 그를 쳐다봤다.
강하성은 책상 위의 내선 전화를 들고 언짢은 말투로 쏘아붙였다.
“당장 전체 회의 소집해. 방안을 이딴 식으로 짜는 게 어디 있어? 회사가 이런 폐인들을 길러주는 곳이야?!”
‘일 때문이었네.’
임서우는 그런 그가 실로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강하성은 너무 바빠서 이혼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혼이 하기 싫은 것도 아니다. 단지 이혼이란 일이 그에게 그다지 중요치 않아서였다.
이 결혼은 처음부터 그에게 아무런 존재감이 없었다.
곧이어 육정인이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다들 회의실에서 기다리십니다.”
강하성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임서우가 쫓아가려 했지만 육정인이 가로막았다.
“사모님은 일단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용건 있으시거든 대표님 회의 마치고 다시 얘기해요.”
임서우는 마지못해 포기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육정인이 직접 배달음식을 가져왔다.
“사모님께서 어떤 음식을 좋아하실지 몰라서 아무거나 골라봤어요. 마음에 안 드시면 다시 가서 사 오라고 할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임서우가 초조하게 물었다.
“회의는 아직도 안 끝났어요?”
육정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좀 더 걸릴 듯싶네요.”
“그럼 점심은요?”
육정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굶어야죠 뭐. 대표님이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누가 감히 먼저 말을 꺼내겠어요?”
그는 더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천천히 드세요 사모님. 다 먹은 음식은 이따가 와서 치우라고 할게요. 저는 또 얼른 돌아가 봐야 해요.”
임서우는 점심을 다 먹고도 몇 시간이나 더 기다렸다.
그동안 그녀는 몇 번이고 회의실 문 앞을 어슬렁거렸는데 안에서 확실히 다들 분주하게 보내고 있었다.
강하성은 마치 모든 사람과 원한을 맺은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사람들은 감히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가정법원도 진작 퇴근했을 테니 임서우는 마지못해 포기했다.
그녀는 문 앞에 다가간 순간 무언가 떠올랐다.
곧이어 다시 사무실 책상 앞으로 돌아가 가방에서 초콜릿 한 개를 꺼내 위에 올려놓은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강하성이 다시 사무실에 돌아오자 시간은 어느덧 밤 여덟 시였다.
그는 책상 위의 초콜릿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집어먹었다.
입에 넣은 순간 쓴맛이 퍼져 올라 미간을 구기다가 초콜릿이 서서히 녹으면서 입안에도 진한 코코아 맛으로 가득했다.
강하성은 커다란 통유리창 앞에 한참 서 있다가 임서우에게 카톡을 보냈다.
[다음 주 수요일 8시 30분에 가정법원 앞에서 만나.”
그 시각 임서우는 이제 막 김은아에게 오늘 낮에 있은 일을 한바탕 푸념했다.
둘은 소파에 기대앉아 각자 품에 쿠션을 안고 있었다.
“네가 브레인에 있는 거 백지민이 어떻게 알아?”
김은아는 늘 뭔가 찝찝했다.
전에 장하영이 모함하고 이번엔 또 백지민이 소란을 피웠다. 보다시피 이들의 목적은 단 하나, 임서우가 이 회사에서 잘리길 바라고 있다.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됐겠지?”
말하는 임서우도 믿기 힘들었다. 우연이 하도 많았으니까.
그녀의 의심이 점점 더 켜졌다.
“그럼 이젠 어떡하려고?”
“이연아 씨 연락 기다려야지. 좋은 소식일 리 없다는 건 알지만서도.”
“한 번 더 쟁취해보지 않고?”
임서우는 침묵했다.
이연아의 생각을 바꿀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녀의 실력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녀는 정말 이 직업이 너무 간절했다.
“나 결정했어 은아야. 요 며칠 설계도를 몇 장 그려서 다음 주 월요일에 매니저님께 보낼 거야.”
“그래.”
김은아는 두 손 들어 찬성했다.
이게 바로 임서우지. 온갖 불공평하고 운 나쁜 일에 맞닥뜨리더라도 그녀가 누구인가? 잡초보다 더 완강한 임서우잖아!
김은아는 굳게 믿는다. 그 언젠가 임서우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줄 거라고.
잠들기 전에 임서우는 휴대폰을 잠깐 들여다봤다.
그녀는 코끝이 찡하고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왜 그래 서우야?”
임서우는 김은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니야, 아무것도.”
김은아는 카톡 내용을 힐긋 보았다.
이어서 임서우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너무 슬퍼하지 마. 조만간 해결해야 할 일이잖아. 어쩌면 너한테는 오히려 해탈일지도 몰라.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강하성을 사랑한 이 몇 년 동안 너 진짜 너무 힘들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