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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갑자기 다리가 차가워 김수지가 머리를 숙였을 땐, 박민혁이 한창 그녀에게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그에게선 이미 이혼 얘기를 꺼낼 때의 냉담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심지어 그녀에게 제일 편안한 각도를 찾아주기 위해 본인은 거의 바닥에 반쯤 꿇어 앉아있었다. 길다란 두 다리가 바닥과 침대 끝자락에서 힘겹게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 여전히 신처럼 고귀했다. 그의 손끝은 살짝 차가웠지만 목소리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하루 세 번씩, 앞으로 꼭 약 바르는걸 기억해." 그는 더 이상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김수지는 그의 말 뒤에 숨은 뜻을 알아챘지만, 맘 속에는 달콤함인지 쓸쓸함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혹여라도 자신의 미련이 보일가 재빠르게 시선을 돌려 담담한 척 "알겠어요."라고 답했다. 자기 몸에 좋은 일을 그녀가 하지 않을 리가 없다. "진 집사님." 알겠다고 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박민혁은 한편으로는 시름이 놓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알지 못할 실망감이 들었다. 김수지...... 이렇게 빨리 적응했나? 그녀는 전혀 그를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았고, 그가 없어도 여전히 잘 살것 같았다. 그의 눈에는 불쾌한 기색이 스쳐지나갔고, 방의 온도는 갑자기 몇 도나 떨어진 듯 했으며, 목소리는 조금 더 무거워졌다. "들어와서 사모님 방을 청소해요." 김수지는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박민혁의 오늘 오락가락하는 기분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방금 내린 분부였다. 진 집사님은 방 청소같은 사소한 일까지 할 필요가 없는 분이였다. 진 집사도 본인이 방금 잘못 들은 건지 의혹스러워 다시 되물었다. "회장님, 사람을 불러 지금 방 청소를 시킬가요?" "왜요?" 박민혁의 눈빛은 칼날처럼 그의 몸에 꽂혔고, 차가운 목소리는 마치 사람을 얼게 만들 것만 같았다. "직접 내 아내 방을 청소하는게 그렇게 힘들 것 같나요?" 그는 진 집사에게 한번도 이렇게 강압적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집사 아저씨의 이마에 땀이 맺혔고,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김수지를 한번 보고, 다시 직접 약상자를 정리하는 박민혁을 보고는 순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회장님……" 박민혁이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 김수연이고, 지금 김수연이 돌아왔는데, 회장님은 왜 아직도 김수지를 신경 쓰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김수연 대신일 뿐이니, 가능한 한 빨리 박씨 가문을 떠나야 하는게 맞다. 회장님은 김수연처럼 어릴 때부터 깨끗한 환경에서 자란 여자와 함께해야 한다. 친부모도 좋아하지 않는 김수지 같은 사람은 정말...... 박민혁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박민혁은 그의 의혹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이혼하든 안 하든 진 집사님은 자기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해요."라고 강하게 말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라고 해도 그를 대신해서 선택할 수는 없다. 그리고 김수지에게 그렇게 눈치를 줘서는 더더욱 안된다. 집사 아저씨는 그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아무리 마음 속에선 김수연의 편을 들고 싶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사모님, 오늘 본가에서 사모님을 가로막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그 연회는 김수연을 위해 주최된 것이였고, 김수연과 박민혁의 성장과정을 지켜본 모든 하인들이 전부 본가로 갔다. 그리고 박민혁 주변의 모든 친구들도 전부 연회에 참석했다. 그래서 집사 아저씨는 너무 당연하게 김수지가 철저히 버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맘 속의 경멸감은 당연히 숨길 수가 없었고, 더욱이는 김수지로 인해 김수연의 좋은 기분을 잡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박민혁이 눈여겨 볼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방금...... 그가 약상자를 가져온 속도가 조금 느렸을 뿐인데 그것마저 박민혁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진 집사는 맘 속에 의문이 가득했고, 순간 박민혁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박씨 가문을 이어받은 이후로, 그는 한번도 박민혁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는 듯 했다. 아무래도 회장님 앞에선 그냥 그의 말대로 순동하는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김수지는 어른이 고개를 숙여 자기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어쩔 바를 몰라하며, 연신 손을 흔들며 "정말......정말 괜찮아요, 진 집사님."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김수지에게 아주 잘해줬다. 게다가 진 집사님은 이미 연세도 있으신데, 그녀는 도저히 어르신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 기쁜 것은 박민혁이 자신을 감싸고 돌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말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건 박민혁의 지시가 아니라, 진 집사님이 혼자 결정한 것이다. 그녀는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아 갑자기 박민혁의 옷 소매를 잡고 집사 아저씨를 위해 한마디 했다. "여보~ 집사 아저씨가 이미 사과했잖아요. 어서 방으로 가서 쉬라고 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말랑말랑하여, 사람을 부를 땐, 마치 영혼까지 빼앗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전에 그가 화를 낼 때면 그녀는 항상 이렇게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가 이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김수지!" 그는 엄숙한 말투로 "앞으로 다시는 나한테 이렇게 얘기하지 마."라고 말했다. 그의 옷 소매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눈 밑에 다시 차오르는 쓸쓸함을 애써 억누르고 그녀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그녀는 왜 깜빡했을까? 그가 방금 전 이혼하자고 한 말을! 노고가 많은 진 집사님 앞에서 아무리 그녀의 편을 들어줘도, 아무리 그녀에게 예전처럼 작은 것 하나하나 챙겨줘도, 심지어 작은 상처 하나에도 그렇게 긴장했다 해도, 그들이 곧 이혼한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녀를 버렸다. 이는 그녀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고, 그녀는 더이상 그에게 애교를 부릴 자격조차 없어졌다. 그녀의 손은 그렇게 힘없이 축 떨어졌다. 선을 넘은 건 자신이였다! 그 사람은 이제......더 이상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오늘까지도 그녀에게 잘해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품성이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김수지의 마음은 마치 철사에 걸려 당겨져 피가 흐르듯이 계속 아파왔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한송이 따뜻한 해바라기 같이 지치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수속은 언제 할건가요?" 이 말 한마디를 하는데 그녀가 얼마나 많은 용기를 내어 마음 속의 미련을 억눌렀는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이혼을 원하니 그녀는 받아주기로 했다. 이에 박민혁은 오히려 흠칫 놀랐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그녀가 말하는 수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김수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마치 이 결혼은 그녀에게 헌 걸레짝처럼 아무렇게나 버릴 수 있는 것 같았다. 이 여자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호하구나! 마음 속의 불쾌함은 점점 커져갔고, 그의 찌푸려진 눈썹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의 시선은 마치 못처럼 김수지의 몸에 박혔다. "넌 정말 그렇게 한시도 참지 못할만큼 나랑 이혼하고 싶어?!" 김수지는 좀 혼란스러웠다. 이혼을 제안한 사람은 그쪽이 아닌가요? 당신의 의견에 그냥 순종적으로 따르는 것도 잘못인가요?! 그녀는 정말로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없었지만, 자신이 다시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방금처럼 그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기 위해, 온갖 말도 안되는 이유로 말을 돌리려고 했다. 그녀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난 별로 원하는 것도 없어요...... 이혼하게 된다면 난......" 박민혁의 입가에는 순간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벌써 조건을 얘기하기 시작한건가? ! 정말 그녀를 과소평가했네! 박민혁이란 사람도, 심지어 그와 김수지 사이의 결혼 생활도, 그가 제시한 이혼조건보다 못한 것이였다니! 고작 500억 따위에 이렇게 마음이 움직여, 한시도 참지 못하고 금액을 추가하려는 모습이라니! 허...... 정말 사람을 잘못 봤네. 이렇게 돈에 미친 여자를 어찌 감히 김수연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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