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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그녀는 그 순간 머리가 다운된 것 같았다. 다만 자신의 아랫배를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허전한 눈빛으로 눈물만 흘릴 뿐이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슬픔이며 엄마로서의 본능만 남아있을 뿐. 그녀의 아기가...... 그녀의 아기가 유산되기 직전이다! 그녀가 그토록 기다렸던 아기가! 친부한테 잔인하게 살해당해야 한다니! 몸에 무한한 힘이라도 실린 듯 그녀는 필사적으로 박민혁한테 달려들었다. 이 덮침이...... 많은 의사를 제치고 박민혁한테 직접 덮쳐졌다! 그녀는 원망스러웠다! 그 당시 그녀의 옆에 있었으면서 도움을 구하는 그녀를 외면한 박민혁이 원망스러웠고, 다시 한번 자신과 그 여자 사이에서 그 여자를 선택한 게 원망스러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감기로 인해 의식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더욱이 임신 사실을 들키지도 않았을 것이며, 자신의 아기 또한 지켜줄 수 있었으니까! 방금 아기가 죽어야 한다고 했던 그의 말을 생각하면 김수지는 그의 살을 잘근잘근 씹고 피를 삼킬 정도로 이가 갈렸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왜 나랑 결혼했고! 또 왜 결혼 후 나한테 그렇게까지 잘해줬냐고!” 그녀는 줄곧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다! 우스갯소리에! 그녀는 분노에 가득 차서 눈앞의 남자를 미친 듯이 주먹으로 두드렸다. “넌 양심도 없어, 양심도 없어!” 박민혁은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어젯밤엔 그녀한테 미안했다. 열이 내렸다고 안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김수지가 일반 감기가 아닌 B형 독감에 걸렸다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 병은 주로 노인과 아이, 그리고 임산부를 공격하는 경우가 많으며, 반복되는 고열과 몸살 증상이 특징이다. 비록 김수지가 쉽게 질병에 걸릴 이런 취약 계층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건강 상태가...... 확실히 많이 허약했다. 박민혁은 어젯밤에 변우빈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아무리 그녀를 달래도 김수지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으며, 얼굴에 눈물범벅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얼떨떨한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박민혁은 혼란스러워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크게 소리 질렀다. “김수지! 왜 이렇게까지 흥분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남자의 호통은 그녀를 흠칫 놀라게 만들었다! 금세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보는데, 김수지는 그제야 비로소 주위의 모든 것이 방금 전에 본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실은 순백색이 아니라 따뜻한 집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병원의 VIP 스위트룸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녀는 너무 무서웠고 너무 절망스러웠다. 꿈에서까지 박민혁에게 버림받았고 박민혁한테 뱃속의 아기까지 들켰으니! 다행히 꿈이었고, 꿈이라서 다행이었다...... 그의 손끝이 아랫배에 닿았을 때의 그 무서웠던 느낌을 생각하면 김수지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맑은 살구눈을 들어 비난하는 듯 그를 바라보는데 다행스러움과 원망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박민혁, 그래도 양심은 있네......” 단지 그가 그녀와 아기에게는 그의 마음을 한 푼도 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가 받았던 것은 모두 그의 가식일 뿐이고! 밥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던 안소희가 방에서 들리는 다툼 소리를 듣고 곧바로 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다. "수지야!" 김수지가 아이가 유산된 줄로만 알고 스스로 박민혁에게 고백하면 안 되는데! 그녀는 김수지를 향해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이고 배를 만지며 위아래로 자신의 명치를 쓸어주면서 숨을 고르는데, 그 뜻인즉 아기가 안전하고 박민혁은 아직 아기의 존재를 모른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김수지가 그녀의 제스처를 알아차렸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좀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겨우 9주라서, 아랫배가 나오지도 않았었고 변우빈 또한 그녀 편이잖은가…… 그녀가 너무 예민한 탓에 혼란스러움이 생겼던 것이다. 더욱이 박민혁 또한 아기가 생기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난 3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기가 생기지 않았고 만약 그랬던 그에게 아기의 존재를 알린다면 그녀의 꿈에서처럼 잔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두려운 것은 박민혁이 아기의 존재를 알고 그녀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김수지는 마침내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고 모든 게 그녀가 너무 긴장했었던 탓이었다. 호랑이도 제 새끼 안 잡아먹는다고 박민혁이 그렇게 잔인한 사람일 수는 없지. 방금 박민혁을 때려대며 했던 과격한 동작으로 아기에게 충격이 가지는 않았을까...... 엄마라는 사람이 왜 항상 이렇게 데면데면하고 충동적일까?! 김수지는 자신한테 뺨이라도 두 대 후려치고 싶었다! 박민혁은 그녀가 약간 흐리멍덩한 틈을 타서, 과격한 흥분으로 그녀가 지쳤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두 손을 컨트롤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에 그녀를 천천히 병상으로 에스코트했다. 이 광경을 본 안소희는 부부를 위한 공간을 남겨두고자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함께 얽혀진 그들의 손을 보며 안소희는 결혼 때도 박민혁이 그렇게 김수지를 꼭 잡았었는데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 합의서에 왜 아직도 서명 안 해?" 자신과 그 여자 사이에서 계속 후자 쪽으로 기우는 박민혁에게 그녀는 진저리가 났다. 그래서 더더욱 아기의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고...... "아직 너의 조건들을 말하지 않았잖아."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박민혁이 약간 멈칫하는데 눈에는 자신도 모르는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 "네가 다 말하면, 바로 서명할게." 김수지가 마음속에 남겨두었던 마지막 기대마저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가 그래도 다소 섭섭해서 그래서 오랫동안 서명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 결혼에 미련이 있었던 사람은 결국 그녀 자신뿐이었다. 누군가가 가슴에 구멍을 뚫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수지는 눈앞의 흠 잡을 데 없는 남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당신 돈으로 200억 주고 매장을 매입한 건 알지?" 은행에서 그에게 통보했을 것이다. "알지." 박민혁은 갑자기 너무 차분해진 그녀가 오히려 불안했다. "그 돈들, 애초부터 네가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거야." 김수지는 그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당신이 그 여자와 그곳에 갔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스커트도 한발 앞서 사 갔더라." 이 말에 박민혁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 그가 김수연한테 왜 갑자기 꼭 화이트 바탕의 블랙 플라워 스커트여야 하냐고 이유를 물었었는데, 알고 보니...... 김수지가 좋아하는 거라고? "우연이겠지." 박민혁은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그 사람, 다른 사람 물건을 빼앗거나 욕심내는 그런 사람 아니니까, 네가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내가 사과할게." "호호호......" 그런 박민혁을 보면서 김수지는 간신히 참았던 눈물이 다시 떨어질 뻔했다. "당신, 그 사람을 너무나도 잘 아시네요." 그녀의 남편으로서, 다른 여자를 위해 그녀에게 사과하다니, 정말로...... 그녀한테 마음이 쓰인 적은 있기는 했을까? 김수지는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이 이혼한다는 사실을 요즘 줄곧 회피해온 것처럼. 하지만 피한다고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결혼 파탄의 책임이 그 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두 사람 중 한 사람 마음이 변한 것임을 그녀 또한 잘 알고 있다. "그 사람, 착한 사람이야." 박민혁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어젯밤엔, 그 사람이 당신보다 더 심한 증상을 보였어, 나는......" "어?" 김수지가 되물었다. "그럼, 그 사람도 지금 나처럼 병원에 있는 건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김수연은 차가운 음식 때문에 위통은 있었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어, 의사로부터 고작 한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그만해." 김수지는 그 여자 때문에 몇 번이고 초라해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녀는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당신 돈을 200억이나 써가며 매장을 매입한 일은, 사실 나를 배신한 당신에 대한 복수야." 비록 이 복수가 박민혁에게 있어서는 별로 중요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그날 SK에서 김수지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혼 조건, 따로 없어요. 우리 이혼 사실, 외부에 알리지 말고 비밀로 해주세요." 그녀가 잠시 머뭇거렸다. "할머니 건강이 안 좋으셔서 2년간 지금 집에서 회복 중이신데, 그걸 아시면 충격을 받으실까 봐 걱정되어서요." 박민혁의 할머니가 그녀를 끔찍이 아끼는 건 박민혁 또한 알고 있었지만, 김수지의 이혼 조건이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렇게 쉽게 이혼에 동의한 건, 세한그룹의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녀를 오해했단 말인가? "그 매장을, 내가 운영하지는 않을 것이고, 보름 뒤에 일이 마무리되면,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거예요." 보름 뒤? 뭐 하려고? 박민혁은 묵묵히 이 시간을 기억했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묵인했다. "됐어." 천천히 병상에 누운 김수지는 박민혁이 손을 쓰기도 전에 스스로 이불을 잡아당긴 뒤, 살며시 두 손을 아랫배에 얹었다. 아기가 아직도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그녀는 배를 만지며 박민혁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 "이제 별장으로 돌아가서 내가 이미 서명한 이혼 합의서를 가져와도 돼. 이혼에 관한 것들, 오늘로 마무리 지을 수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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