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그녀는 순간 뒤로 움츠리며 무의식적으로 임신한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게 되였을 때, 그와 나누고 싶었던 기쁨은 이미 사라졌고, 지금은 단지 아기를 자신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권리를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그럴려면 아기의 존재는 비밀로 해야 했다. "배 아픈 건 내가 아니라 소희에요. 변우빈이 당신을 속인거예요."
박민혁은 내 민 손이 허탈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픈 사람이 그녀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옆에 분명 다른 여자가 있는데 아직도 나를 신경 쓸 일이 있겠어?
김수지는 눈을 비비더니 다시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요염한 그 얼굴을 보면 볼수록 착각하기 쉬웠다.
절대 착각해서는 안 된다. 아니면 아쉬움에 차마 떠나지 못 할가 봐 맨스레 두려워졌다.
그녀는 오늘 김씨 집안에서, 꽃집에서, SK에서 봤던 광경을 필사적으로 떠올렸고,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 연회."
박민혁은 어리둥절했다. "어?"
"그날 집사 아저씨가 나를 막았던 옛 저택의 연회, 그녀를 위한거였죠?"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 뭐 해." 그가 답해 주지않았지만, 김수지는 이미 명확한 답을 얻었다.
친히 집사 아저씨를 훈계해 그녀를 감동하게 했던 일, 이제 보니 그가 장본인이였고, 집사는 그를 감싸기 위해 희생한 셈이였다.
돌아오는 길 내내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별장에 도착하자, 김수지는 집사 아저씨를 각별히 친절하게 대했다. 심지어 외출하기 전에 끓여놓은 죽을 부엌에서 가져다 주기도 했다.
죽에는 참마, 대추, 연꽃씨를 넣었다. 비록 흔한 재료지만, 중요한 건 김수지가 제일 자신 있는 죽이었다.
그녀는 이 죽을 자기만의 비법으로 항상 다른 사람들과 다른 맛을 만들어냈다.
박민혁이 지난 삼년 동안 위병을 앓은 적이 거의 없는것도, 이 영양죽 덕분인 것이다.
"집사 아저씨, 천천히 드세요. " 김수지는 부담없이 마시기 좋은 양을 떠왔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진영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한 그릇 드릴게요."
보스를 감싸주랴 혼계도 들어주랴, 박민혁의 부하라서 각별히 고생이 많네요.
진영은 이 의외의 영광에 어쩔줄 몰라 놀라더니 공손하게 받으며 말했다. "진작부터 사모님이 끓인 죽이 어떤 맛인지 맛보고 싶었습니다. 매번 회장님이 드실 때마다 향을 맡으며 무척이나 궁금했었어요......"
진영의 흥분에 찬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김수지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참 놀라운 광경이였다. "왜요? 맛이 이상해요? 왜 떨어요? "
진영은 지금 당장 김수지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말을 섞을 담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남편이 어떤 사람 죽일 눈길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지 몰랐다. 진영은 눈앞의 죽이 좀처럼 넘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별......별일 없습니다." 그는 식은 땀을 닦아내더니 재빨리 아버지인 집사 아저씨의 방으로 도망갔다.
"별일 없다니 다행이네요." 김수지는 안심하며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박민혁은 소파에 앉아 낯색은 좀 풀리렸지만, 눈길은 계속 김수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김수지가 죽을 가져다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두 그릇이나 나눠가더라도, 자기 몫은 남아있을거라 믿었다.
허나 솥은 보란듯이 바닥을 드러냈다.
오늘은 밖에 오래 있다보니 전화로 집사에 연락해 불조절을 했기에 이전보다 양이 좀 적었다.
하지만 괜찮아. 아직 좀 남아있어 뱃속아기랑 한끼는 때울 수 있었다.
김수지는 그릇을 가져다가 남은 죽을 퍼내 박민혁의 곁을 지나갔다. 그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바로 이 곳에서 먹지 않기로 결정했다. 눈에 보이면 짜증만 났다.
박민혁은 김수지가 죽그릇을 들고 올라가는 뒷모습을 말없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내 몫은?
설마 아직 주방에 있는건가?
이층에서 문 닫는 소리가 들리자 박민혁은 얼른 걸어가 부엌을 둘러보았다. 거기엔 아무것도 남이있지 않았다. 김수지가 매일매일 손수 끓여 주던 위에 좋은 참마죽이 그냥 평범한 일상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텅 빈 냄비를 보면서 그는 갑자기 자기 마음도 텅 빈듯 느껴졌다.
뚜껑을 잃은 냄비처럼 휘이잉하면서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이때 김수지는 방에서 죽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평소에는 적은 양을 여러번 나눠먹어 저녁식사 후의 후식은 일상으로 되였다. 예전에 박민혁은 늦게까지 일을 보더라도 돌아오면서 그녀에게 죽과 반찬을 사다주기도 했고, 때로는 주방 아줌마가 따로 만들기도 했었다.
다만 그녀가 밥을 먹든, 죽을 먹든, 그는 꼭 옆을 지켜주곤 했다.
그후 김수지는 그가 위가 안좋은 걸 알고 차차 죽을 끓이게 되였다. 심지어 머리를 굴려 삼마죽에 한약재를 넣었더니 풍미뿐만 아니라 몸에도 한껏 좋은 보약으로 변했다.
알심들여 그의 건강을 지켜온 그녀에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외도.
설령 그녀에게 죽을 사온다해도 예전처럼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날 자기를 토하게 만든 옥수수죽을 생각하니 섭섭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행히도 그녀에겐 사랑이 없는 자를 떠날 용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그녀가 죽을 다 마셨을 때 문득 박민혁이 왜 지금까지 방에 돌아가지 않는 지 궁금했다.
요즘 다른 여자와의 데이트를 맘껏 즐기다가 위가 또 안 좋아진 건가?
지금 혹시 위가 아픈 건 아닐까?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뒤척거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갑자기 자책감이 몰려왔다. 한 그릇 나눠줬을걸......
가까스로 날이 밝을 때까지 참았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침실 밖으로 나갔더니, 박민혁은 어젯밤에 별장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밤새 걱정에 찼던 마음이 순간 차가워졌다.
그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고 위도 걱정할 필요없이 튼튼했다. 단지 이젠 그녀가 더 이상 필요없어, 다른 사람을 찾아간것뿐이다.
넋이 나간 채,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그후 오전내내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 집사 아저씨는 그녀가 늦잠 자는 줄 알았다. 예전에 박민혁은 그녀를 너무 아껴 정성스레 여러가지 아침 식사를 고안했고, 매일 아침준비를 마친 후에야 그녀를 깨웠다.
심지어 그녀가 먹고 난 후, 다시 잠자리에 들게 하기도 했다.
허나 한낮이 지났는데도 그녀가 일어나지 않자 이상해서 방에 들어가 확인해보니, 뜻밖에 김수지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박민혁의 훈계를 기억한지라 지체없이 그에게 연락했다.
박민혁은 어젯밤부터 회사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마침 쉬려고 하던 때에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그는 집사 아저씨인 것을 보고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회장님." 집사 아저씨는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사모님, 사모님이 지금 열 나고 있어요! 하인 말로는 오래 고열이 시달린 듯 합니다. 지금은 헛소리까지 해요! "
박민혁은 벌떡 일어섰다. "기다려. 늦어도 이십분이면 도착해. "
가는 길에 그는 변우빈에게 연락해 집으로 와서 진료를 부탁하고, 속도를 내 차를 몰아 별장으로 향했다.
사십분의 거리를 절반 이상 단축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변우빈은 아직 오늘 길이라 박민혁은 그의 지시대로 물리적으로 김수지의 체온을 내리기로 했다.
얼굴이 빨개진 그녀는 이불 속에 움츠러든 병아리마냥 가냘펐고, 보송한 머리카락은 유난히 얌전한 모습이었다. 차갑게 그를 대하던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였다.
그가 그녀의 옷을 천천히 풀어제치자, 눈결같은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