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연기 안 하는 거야

"너보다 뻔뻔하겠어? 일 다 버리고 애인이랑 휴가 보내러 간 너보다 하겠어?" 배지훈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챘다. '거래처에서 연락왔나 보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프로젝트 디자인은 진작에 정해졌고, 상대방은 나한테 디자인을 수정하려고 연락했을 것이었다. 몇 달 전 확실히 내가 프로젝트를 책임졌지만 나중에 죽을 것 같아 일할 마음이 사라졌다. 그때 배지훈의 곁에는 여진아가 아니었는데, 어찌 됐든 누군가가 있었기에 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한테 내 프로젝트를 넘기고 재무팀한테 내 모든 월급을 깎으라고 했다. 그랬다, 원래 난 일도 있었고 월급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내가 자기한테 빌붙어 살아야 했기에 무조건 사정할 거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사정할 성격이 아니었고 잘못이 없었기에 더 사정할 리가 없었다. 전에 연애할 때부터 그는 나를 이기지 못했다. 지금 내가 아프고 몸이 허약했지만 머리는 유난히 맑았기에 그가 더 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계약에 문제가 생기니까 날 찾아와? 일 없으면 연락 안 하다가, 일 생기니까 바로 연락한 거야?" "너 같은 남자로 사는 것도 참 실패네, 프로젝트 하나도 해결 못 해서 와이프한테 사정하는 거야?" "아니면 날 떠나지 못하고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건가? 역겹네." 나는 며칠 동안 잘 회복되었고 지금 주사를 맞을 돈도 생겼기에 당당해졌다. 특히나 어젯밤에 내가 그의 금고를 박살 내서 돈을 꺼내도 불법이 아니란 걸 알고 난 후로 더 당당해졌다. 원래 우리가 결혼 전에 재산 공증을 하지 않았고 난 평생 놀고먹었기에 그의 돈의 반은 내 것이었다. 기껏해야 내가 내 소유물을 파괴한 게 되기 때문에 경찰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아픔에 시달려 죽을 건지 아니면 배지훈한테 혼날지에 관해 생각해 봤는데 당연히 후자가 더 홀가분했다, 적어도 죽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당당해진 나는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그는 3년 동안 참았던 내가 자기한테 이렇게 말하자 놀라서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나도 더 말하고 싶지 않아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강하연, 이제 드디어 연기 안 하는 거야? 난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연기하나 했네?" "입원했다고 했다면서? 불쌍한 척 동정 유발하다니, 너 정말 대단하네." "배지훈, 나 정말 입원했어." 그 말을 내뱉자마자 나는 바로 후회했다. 그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 역시나 그는 더 크게 웃었다. "연기하지 마,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봤어, 고작 한 바늘 꿰맸는데 입원은 무슨?" "그깟 상처에 내가 마음 아파할 줄 알았어? 꿈 깨!" 나는 눈을 감았고 가슴이 또 아파 났다. 여진아는 살짝 긁힌 걸로 의사 선생님을 불렀으면서 나는 한 바늘 꿰맸는데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왜 의사 선생님한테 내가 의사 사무실에 있었는지 안 물어봐?' '내가 왜 종양과에 있었는지 안 물어봐?' '왜 내가 전화한 게 아니라 경찰이 전화한 건지 안 물어봐?' 신경 쓰지 않으니까 당연히 안 물어본 거였다. 그가 본 건, 내가 겨우 한 바늘 꿰맸으면서 자기한테 중요한 계약을 포기하고 병원에 오게 한 거였고 그것 때문에 여진아가 알레르기가 돋게 한 거였다. 나는 심호흡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어, 나 자러 갈 거야, 안 그러면 어떻게 꿈꾸겠어?" 그는 분노에 차서 말했다. "잠깐!" "프로젝트는 계속 네가 책임졌으니까 이번 일은 네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해." "나 안 해."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의 이런 명령조가 나는 제일 싫었다. 몇분 지나지 않아 그한테서 또 전화가 걸려 왔다. 세 번째 울렸을 때 나는 전화를 들고 소리쳤다. "배지훈, 너 왜 이렇게 천박해? 내가 안 한다고 했잖아, 왜 또 전화하는 건데?" 옆에 있던 간병인이 나의 상처가 찢어질까 봐 얼른 와서 날 부추겼다. 배지훈이 뭐라고 욕했는지 난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는 바로 차갑게 말했다. "처음부터 네가 프로젝트 맡았으니까 끝까지 책임져야 해." 소리를 지르고 나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고 많이 진정되었다. 프로젝트는 내가 책임진 거였고 사실 실행만 남았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책임지면 일을 해야 했고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었기에 나는 몇 초 지나서 물었다. "얼마 줄 거야? 전에도 프로젝트 인센티브도 안 줬잖아." 그때 내가 끝까지 참여하지 못해서 인센티브가 모두 깎였었다. "강하연, 네 안 중에는 돈밖에 없어?" "돈이 그렇게 중요해? 강하연!" 나는 그가 이를 바득바득 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화를 낼 때면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갈았었다. 특히나 나와 화내면서 내 이름을 부를 때는 유난히 더 선명하게 말이다.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맞아, 당연하지." '돈이 있으면 난 살 수 있고, 돈이 없으면 난 아주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거든.' '돈이 안 중요하면 네가 중요하겠어?' 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1분이나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돈을 그렇게 사랑하니까, 프로젝트 인센티브 다 너 줄게!"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고 마지막으로 귀띔해 주었다. "기본 월급이랑 야근수당도." "젠장, 다 너 줄게!" 그는 분노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잘 됐어, 프로젝트 인센티브 받으면 당분간은 장롱 안 부숴도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