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진해영이 건넨 수표를 본 고남연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의아한 투로 물었다.
“어머님, 이게 뭐예요?”
진해영이 곧바로 대답했다.
“여지수가 북진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건 다 북진이한테서 콩고물 떨어질 게 있나 보고 있는 거잖니. 애가 바라는 게 돈이라면 주면 그만이지.”
“그러니까 남연아, 가서 이 수표 주면서 걔네 엄마랑 동생 데리고 A시를 떠나라고 해. 안 그럼 좋은 꼴 못 볼 거라고도 하고.”
진해영이 건넨 40억짜리 수표를 본 고남연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몰라햇다.
평소에는 현명하기 그지없던 진해영이 왜 지금은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님, 제가 진짜로 여지수 찾아간다면 그거야말로 제 무덤 파기죠. 걘 절대로 이 돈 들고 A시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만약 정말로 이 수표를 들고 여지수를 찾아간다면 그건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자신과 윤북진의 이혼만 앞당겨질 뿐이었다.
그녀는 아직 아이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진해영은 달랐다.
“남연아, 이 일은 내 말 들어. 잘못될 리가 없어.”
“우선 이 수표를 그 여자한테 주면 내가 곧바로 찾아갈게. 분명 부담스러워서 못 견딜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디 가서 이렇게 40억을 벌 수 있겠어? 어떻게 걔네 엄마랑 동생 뒷바라지하겠어?”
고남연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어머님, 이 일은.”
고남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해영이 그녀를 막았다.
“남연아, 넌 애가 너무 착해서 탈이야. 여지수의 속내가 얼마나 시커먼데, 넌 그애 못 이겨.”
진해영이 흥분을 한 것같자 고남연은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여지수를 이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윤북진의 마음에 그녀가 없었기에 고남연은 뭘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처참한 말로밖에 남지 않았다.
심판의 마음부터가 한쪽으로 기울어있지 않은가.
“남연아.”
진해영이 다시 그녀를 부르자 겨우 정신을 차린 고남연이 수표를 받아서 들었다.
“네, 그럼 다녀올게요.”
진해영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니 고남연은 그녀의 뜻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먼저 나섰다간 일이 더 시끄러워질지도 몰랐다.
일이 커지면 그녀와 윤씨 가문의 명성에 흠이 갔다.
진해영의 수표를 받은 이튿날 고남연은 여지수를 카페로 불러냈다.
커피숍 안, 그녀는 말을 돌리지 않고 단번에 여지수에게 돈을 가지고 엄마와 동생과 떠나라는 말을 했다.
여지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하정운의 전화가 걸려 왔다.
“사모님, 보스께서 오후에 회사에 잠깐 들르시랍니다.”
통화를 마친 고남연은 무력하게 웃음을 흘렸다.
윤북진이 왜 자신을 찾는지 그녀는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30분 뒤 윤북진의 사무실 문을 열자 여지수가 서러운 얼굴로 그의 의자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느릿하게 다가가자 윤북진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오전의 그 수표를 그녀의 앞에 내던지는 것이 보였다.
“네가 준 거야?”
윤북진이 막 수표를 내던지자 여지수가 서러운 말투로 설명했다.
“남연아, 나랑 북진이는 절대로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정말 오해야.”
피해자 코스프레나 하는 여지수의 모습에 고남연은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윤북진의 맞은 편에 무심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왜? 친구가 금액이 마음에 안 든대?”
그런 뒤 한 마디 덧붙였다.
“아님 네가 나한테 40억을 주든가! 그럼 바로 이혼 협의서 작성해서 두 사람 곁에서 사라져 줄게.”
고남연의 무심함에 윤북진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렷다.
옆에 있던 여지수도 의아해져 고남연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연아, 이거 40억밖에 안 돼.”
고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무리 그래도 40억에 이혼을 할 리가 없었다.
그때 고남연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여지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랑 쟨 감정이 두텁겠지만 쟤랑 난 딱 이 정도 값이야.”
지난번 본가에서 그는 화장실에 가는 한이 있어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고 그 뒤로는 자신을 바람맞힌 채 여지수 곁에 있어 주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