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밤.
학교 정문 앞.
“도현 오빠, 오늘은 내가 잘못했어요. 화 풀어요, 네?”
연지아는 눈가가 붉어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배도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배씨 가문 저택을 나서고 난 뒤에도 배도현은 표정이 풀리지 않았고 연지아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길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배도현은 그녀의 손을 툭 떼어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지아야, 헤어지자.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의 차가운 말에 연지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그는 입술을 떨며 겨우 물었다.
“왜... 왜 그러는데요?”
배도현은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쏘아붙였다.
“네가 뭔데 감히 송유진을 모함하려고 해?”
그 말에 연지아는 굳어버렸다.
‘지금 송유진 때문에 나랑 헤어지자는 거야? 오빠는 분명 송유진을 싫어하지 않았나?’
배도현은 더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 듯 돌아가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거침없이 떠났다.
운전하면서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하준식, 애들 불러. 한잔하자.”
하준식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여자 친구 데려다준다더니 술 마실 여유는 있네?”
배도현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올 거야, 말 거야? 안 올 거면 됐어.”
“간다, 가. 도현이가 부르는데 당연히 가야지.”
30분 후 배도현은 룸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 들어오는 배도현을 보고 하준식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 네 여자 친구는?”
“질렸어.”
배도현은 안쪽으로 걸어가며 툭 내뱉었다.
“질려?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하준식이 당황해하며 물었지만 배도현은 대답 대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다른 친구들도 그 말을 듣고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다른 여자들은 물갈이해도 송유진은 꿋꿋하네.”
그러자 배도현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준식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잠시 지켜보다가 옆에 앉아 슬쩍 물었다.
“도현아, 유진이한테 전화 한 번 해볼래?”
배도현은 심드렁한 태도로 대꾸했다.
“내가 왜 걔한테 전화해?”
하준식은 엄지를 치켜들며 웃었다.
“그래, 그냥 지금처럼 해. 절대 돌아보지 마. 안 그러면 유진이한테 잡힌다.”
배도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왜 돌아봐. 걔가 뭐 천사라도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배도현의 시선은 테이블 위 자신의 휴대폰을 향하고 있었다.
하준식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전형적으로 속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준식은 그를 떠보려고 갑자기 배도현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배도현은 그를 보며 말했다.
“내 폰으로 뭐 하려고?”
“유진이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하려고.”
“오라고 해서 뭐 하게? 보기만 해도 짜증나는데.”
배도현은 말로는 그랬지만 하준식을 막진 않았다.
하준식은 연락처에서 송유진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연결음이 한 번 울리더니 곧바로 자동 안내음이 들려왔다.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님의 요청으로 착신이 금지되어 연결할 수 없습니다...”
하준식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어? 연결이 안 되네? 너 혹시 차단당한 거 아냐?”
그 말에 배도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하준식에게서 휴대폰을 빼앗아 차단된 통화 기록을 확인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누가 너보고 내 폰 건드리랬냐?”
하준식은 멈칫했다.
“아니, 난 너를 위해서 그런 거지.”
“날 위해서 그랬다고? 날 위해서 유진이 부르는 거야? 내가 걔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르냐?”
“...”
하준식은 말을 잇지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에휴, 그러다 후회하지나 마라.’
침묵이 흐르자 배도현은 갑자기 화를 내며 손에 든 술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잘 들어. 앞으로 누구든 송유진이랑 연락하면 친구고 뭐고 끝이야.”
유리잔이 산산조각 났고 깨진 파편이 배도현의 얼굴을 스쳤지만 그는 아프다는 기색조차 없었다.
방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누구 하나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배도현은 냉소적으로 쏘아붙였다.
“뭐야, 다들 귀먹었어? 대답 좀 해!”
사람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들었어.”
배도현은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움켜쥐고 문을 쾅 닫으며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자 누군가 하준식에게 다가와 물었다.
“준식아, 도현이랑 송유진이 무슨 원한이 있어?”
하준식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알겠냐.”
또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근데 말이야, 송유진 진짜 괜찮은 애잖아. 얼굴 예쁘지, 몸매 좋지, 성격도 착하고. 무엇보다 도현이를 정말 좋아하는데. 진짜 아깝다니까...”
하준식은 묵묵히 듣기만 했고 그 사람은 말을 이어갔다.
“우리도 알잖아. 송유진이 요 몇 년 동안 얼마나 잘했는지. 예전에 도현이가 다쳤을 때 그냥 작은 상처였는데도 유진이가 엄청 마음 아파했잖아.”
“맞아, 도현이가 술 취했을 때도 유진이가 밤새 챙겨줬다더라. 해장국에 죽까지 끓여주면서.”
“내가 그렇게 예쁘고 착한 여자 친구 있으면 날마다 감사하면서 살겠다.”
문밖에서 그 말을 다 듣고 있던 배도현은 속이 더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이놈의 자식들. 내가 헤어지고 나서야 송유진이 잘했다고 떠들어대네.’
차에 앉은 배도현은 한 주 동안 이어진 답답함에 몸을 비틀었다.
송유진은 연락은커녕 그를 차단하기까지 했다.
‘배짱도 두둑하네.’
‘두고 보자.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나중에 울면서 애원해도 절대 봐주지 않을 거야. 꼭 단단히 혼쭐을 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 배도현은 거실에 앉아 있는 어머니 강희옥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엄마.”
강희옥은 고개를 들어 아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연지아라는 애, 난 별로다.”
배도현은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엄마한테 다 별로인가 보네요.”
강희옥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이게 다 널 위해 그러는 거잖아.”
그러자 배도현은 비꼬듯 대꾸했다.
“그쵸, 그래서 헤어졌잖아요. 좋으시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마다 엄마 눈엔 죄다 부족하다면서요.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지, 왕이 아닌데. 엄마도 태후마마는 아니잖아요.”
강희옥은 차갑게 받아쳤다.
“술 많이 마신 모양이네. 아줌마, 해장국 좀 가져와요.”
“나 술 안 마셨어요.”
강희옥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했다.
“전에 얘기한 소개팅 자리, 이미 약속 잡았으니까 내일 나가서 만나 봐.”
배도현은 원래부터 뭔가 얹힌 기분이었던 데다 소개팅 얘기를 듣자마자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엘리베이터 옆에 있던 꽃병을 발로 걷어차며 고함쳤다.
“고등학교 땐 회사 들어가라길래 그렇게 했고 대학에선 금융학 전공하라길래 엄마 말을 따랐어요. 졸업하자마자 회사 들어갔더니 이번엔 공직 진출하라며 나를 조심조심 살게 했죠. 그런데 또 이제 와서 소개팅까지 하라니... 나도 사람이에요, 엄마 소유물이 아니라!”
마지막 말은 거의 소리치듯 내뱉었다.
강희옥은 잠시 놀란 듯했으나 오랜 세월 교양을 갖춘 그녀는 여전히 품위를 유지한 채 말했다.
“한씨 가문이랑 연결되면 뭐가 나빠? 아직도 송유진 같은 돈만 밝히는 애가 생각나서 이러는 거야?”
배도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강희옥은 계속해서 말했다.
“잊지 마. 송유진이 네 옆에 있었던 이유가 뭐였는지.”
배도현은 터질 듯 소리쳤다.
“돈 때문이겠죠! 내가 돈이 많으니까!”
그렇게 외치고는 바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운 도현은 온몸이 뒤틀릴 것처럼 불편했다.
눈가에 난 상처가 따끔거렸고 위도 아파왔다.
그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유진아, 나 배가 너무 아파.”
그는 배를 어루만지면서 망설이다 결국 송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