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새 사람
자궁 소파술을 마치고 수술실에서 나올 때까지도 이서아는 우연한 임신과 유산의 충격에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간호사는 그녀를 병실로 옮긴 후 입원 등록을 하려고 했다.
“1703호 이서아 씨, 가족분 계십니까?”
이서아는 흐릿한 눈빛으로 하얀 천장만 바라볼 뿐 간호사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간호사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이서아 씨, 가족분은요?”
그때 링거 병을 조절하던 다른 간호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나한테 줘요. 내가 적을게요. 구급차에 실려 올 때 주민등록증이랑 은행 카드를 모두 나한테 줬거든요. 알아서 등록하고 병원비도 계산하라고 하더라고요. 이분 가족이...”
이서아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간호사의 말을 이었다.
“전 가족이 없어요.”
소독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이 점점 실감으로 다가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 눈가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아이를 잃었다.
자궁 소파술이 몸에 해로워서 이서아는 병원에 혼자 3일 누워있었다.
네 번째 날 한수호가 드디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비서, 며칠 동안 결근했으면 충분히 쉰 거 아닌가? 다 쉬었으면 시즌으로 와.”
휴대폰 너머로 술을 권하는 소리와 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그녀는 입술을 씹으며 병원에 입원했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한수호가 다시 한번 불렀다.
“이 비서.”
누가 봐도 화난 목소리였다. 이서아는 하려던 말을 삼킨 뒤 퇴원 절차도 처리하지 못한 채 급히 택시를 타고 시즌으로 향했다. 메이크업마저 택시 안에서 간단히 했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립스틱을 바르면서 안으로 들어가 종업원에게 물었다.
“스타 그룹 한 대표님, 어느 방에 있어요?”
고개를 들어 이서아의 얼굴을 본 종업원은 3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
“한 대표님 1번 룸에 계세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업원을 따라 1번 룸으로 갔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노크한 후에야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속이 다 메스꺼울 정도였다.
아직 룸 안에 누가 있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비서가 왔으니까 이 비서랑 마셔요. 갓 입사한 새내기 여자애를 괴롭히지 말고요.”
그러자 바이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 비서는 왜 이렇게 말을 잘 들어? 부른다고 바로 오면 어떡해? 한 대표님이 얼마나 편애하는지 봐봐. 새 사람이 취하는 게 싫으니까 이 비서더러 마시라고 하잖아.”
주변을 훑던 이서아는 바로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그녀의 시선이 한수호 왼쪽에 있는 소녀에게 머물렀다.
이서아는 그녀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이서아를 알고 있었다. 소녀가 어쩔 바를 몰라 하며 말했다.
“서아 언니, 죄송해요. 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한수호가 말을 가로챘다.
“사과할 필요 없어. 이 비서가 무단결근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 이 자리도 원래 이 비서가 와야 할 자리야.”
그 누가 들어도 그의 말투에는 배려와 편애가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수호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감싸준 적이 있을까?
이서아는 그 소녀를 힐끗거렸다. 스물 두세 살쯤 돼 보였고 단정한 원피스에 긴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소녀는 이 시끄러운 곳에서 마치 늑대의 굴에 빠진 토끼처럼 매우 가여워 보였다.
이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웃는 얼굴로 다가갔다.
“서 대표님 또 술을 마시고 계시네요. 간 조심하세요.”
스타 그룹의 비서 실장인 이서아는 이젠 아주 베테랑이었다. 술자리에서도 단 몇 마디로 상황을 바꾸었다. 비록 바이어들과 레드 와인을 몇 잔 마셨지만 초반에 바이어들이 취하기 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던 상황보다는 훨씬 좋아졌다.
그러나 한수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시끌벅적했지만 남자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이서아의 귀에 들려왔다.
“피곤해? 이따가 널 먼저 집에 데려다줄게.”
이서아는 한수호와 3년이나 함께 일했지만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