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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최현우의 손이 움찔거렸다. 손을 들어 그녀의 인사를 받아줄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무뚝뚝한 성격이었던 그는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내의 인사를 무시하기로 했다. 다만 아내의 웃는 얼굴을 보니 차가웠던 최현우의 표정도 다소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망설이던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고아라는 그가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진 뒤 할아버지한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할어버지는 왜 저 사람 손목시계에 계셨던 거예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되물었다. “내가 보이나?” “네, 아주 잘 보이고 말씀도 잘 들려요.” 할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을 뜬 지 오래되었지만 산 사람이 자신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낯선 여자에게 말이다. 다만 그는 눈앞에 있는 고아라에게 호감이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현우랑 아는 사이인가?” 할아버지는 고아라를 보며 물었다. 고아라는 솔직하게 답했다. “네, 몇 시간 전에 혼인신고를 한 사이니까 지금은 제 법적인 남편이죠.” “...” 할아버지는 다소 놀란 눈으로 고아라를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현우를 어떻게 구슬린 거니? 참, 나는 현우 할애비 최준태라고 한단다. 네가 현우랑 결혼했다고 했으니 넌 내 손주 며느리지. 현우는 고집이 아주 센 아이란다. 내가 세상을 뜰 때 현우는 26살이었어. 그때도 연애라곤 한 번도 못 해본 아이였지.” “현우를 쫓아다니는 아이는 많았어. 그런데 현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그래서 나랑 현우 할미가 얼마나 속이 탔는데. 어떤 방법을 써도 소용이 없더구나. 내가 죽고 난 뒤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우 손목시계에 깃들게 되었구나. 참, 현우가 차고 있는 시계는 내가 오랫동안 차고 다니던 시계였단다. 후에 내가 그 시계를 현우한테 물려주었지. 아마도 그래서 내가 그 시계에 깃든 것이겠지.” “나도 매일 이렇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건 아니란다. 언제 또 나올 수 있는지도 몰라. 내 생각엔 특별한 장소에서만 잠깐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것 같아.” 고아라가 소곤거렸다. “할아버지 걱정하실 필요 없으세요. 할아버지께서 그 시계에 깃든 거 보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원인이 있으면 결과도 있으니 그냥 그대로 가만히 계시면 돼요.” “이유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스트레스받게 되거든요. 세상 살면서 행복하게, 즐겁게 사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설령 세상을 뜨셨다고 해도 즐겁고 행복한 영혼이 되면 좋잖아요.” 최준태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쉿, 빙산 같은 내 손자가 오는 것 같구나.” 고아라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최준태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연기를 꽤나 잘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능청스럽게. 고아라는 아직 그에게 어떻게 그의 손자를 구슬린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고아라의 말을 들은 그는 굳이 다시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그저 자신의 손주 며느리인 것만 알면 된다고 생각했다. 최현우는 고아라를 위해 따듯한 물을 한잔 따라 가져왔다. 물잔을 고아라의 앞에 내려놓은 뒤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방금 누구랑 대화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아라가 말했다. “여긴 최현우 씨랑 저뿐인데, 제가 누구랑 대화하겠어요?” 고정태가 그녀에게 당부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과 다른 눈을 가진 것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녀의 절친한 친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 어릴 땐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크고 나니 알게 되었다. 고정태가 그렇게 말한 것은 전부 그녀를 위한 것임을. 만약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이 귀신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대화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면, 누가 그녀와 가까이 지내려 하겠는가? 점쟁이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그녀를 꼬드겨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최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다만 고아라는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최현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잘생겼기 때문이다. 설령 무뚝뚝하고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녀는 감상용으로 보기엔 아주 괜찮다고 생각했다. “왜 자꾸만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자신을 빤히 보는 고아라에 결국 참지 못한 그가 물었다. “잘생겨서요.” “...” “최현우 씨가 저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면, 제가 최현우 씨를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을까요?” 최현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다시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곤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최준태는 그런 손자의 모습에 고아라에게 말했다. “이놈이 지금 너를 탓하고 있구나. 네가 이놈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이놈한테 시간은 금이지. 1분이라도 낭비하면 아주 싫어하더구나.” 최준태의 장손은 일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언젠가 한 번쯤은 손자가 고아라를 위해 일까지 내려놓으며, 흘러가는 시간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고아라를 즐겁게 해주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다. 고아라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최현우는 지금도 본론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현우가 대체 왜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녀가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언짢아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최현우가 너무도 어처구니없었다. “고아라 씨.” 최현우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평소와 같은 냉랭한 눈빛으로 보았다. “우리 관계를 비밀로 했으면 좋겠군요.” “비밀로 하자고요? 아, 그러니까 결혼 사실을 숨기자는 말씀이시죠? 알겠어요, 절대 어디 가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제가 최현우 씨랑 결혼한 것도 사실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운명에 따를 뿐이었죠.” 그녀는 그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혼인신고를 하기 전까지 그녀는 남편이 될 사람의 이름도 몰랐다. “이은비 씨와는 어떤 사이죠?” “친구예요.” 고아라는 이내 뭔가 눈치챈 듯 빠르게 물었다. “혹시 은비를 좋아하세요?”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녀는 당장 구청으로 달려가 그와 이혼해 줄 마음이 있었다. 어차피 그녀는 운명에 따르기 위해 그와 혼인신고를 한 것이니 굳이 그를 붙잡아 둘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요. 이은비 씨는 우리 회사 직원입니다. 그냥 그쪽이 혹시라도 친구에게 우리 사이에 대해 말했을까 봐 물어본 것이죠. 그렇게 되면 회사 전체뿐만 아니라 인하 전체에 소문이 퍼지게 될 테니까.” ‘그랬구나.' 고아라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절대 말하고 다니지 않을 거고, 은비한테도 말해줄 생각 없어요.” 이은비는 그의 회사 직원이었다. 이은비를 데리러 갔을 때 회사 앞에서 본 그의 마이바흐를 떠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퀸즈 그룹이 최현우 씨 회사예요? 은비가 다니는 회사 대표님 맞죠?” 최현우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럼 제가 회사 앞에서 은비를 기다릴 때 본 차가 최현우 씨 차가 맞았네요.” 최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당연히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와 인사를 주고받지 않았을뿐더러 창문을 내려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아주 차갑게 힐끗 보곤 낯선 사람 취급했었다. “혹시 이 말 하려고 날 여기로 부른 거예요?” 최현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묵인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아라는 핸드폰을 꺼낸 뒤 카톡을 열었다. 자신의 QR 코드를 눌러 최현우의 앞으로 핸드폰을 내밀면서 말했다. “제 카톡이에요. 추가해줘요. 앞으로 할 말이 있으면 여기로 하시면 돼요. 굳이 절 힘들게 불러내실 필요도 없어요. 아까는 정말로 그쪽 경호원이 납치범이나 보험 사기단이 아닌가 의심했었으니까.” 그녀의 말에 최준태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고아라는 최준태를 힐끗 보았다. 최준태는 더 크게 웃었다. 어차피 그의 손자는 그가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으니까. 최현우는 최준태의 모습도,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뒤를 힐끔 보는 고아라의 행동을 눈치채곤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생각이 짧아 아라 씨한테 무례를 저질렀네요. 미안해요.” 최현우는 어색하게 사과한 뒤 핸드폰을 꺼내 고아라를 친구로 추가했다. 고아라도 핸드폰을 든 손을 다시 거두며 그를 친구로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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