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분명 꿈이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데도 강서현은 뒤로 물러서는 것을 선택했다. 이건 그녀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은 행동이었다.
강서현은 어릴 때부터 세계 최고의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가 되는 것을 꿈꿨었다. 줄곧 이 목표를 향해 노력하기도 했었고. 그녀는 비서 일을 하면서도 각종 디자인 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 어떻게 쉽게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있을까?
모종의 이유 때문에 더 이상 꿈을 이룰 수 없는 게 아니라면.
순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재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에 한번 손을 다친 적이 있었던 것 같아. 그때 나는 해외에 출장을 가있었는데 돌아와서 보니 상처는 이미 다 아문 상태였었어. 하지만 그저 실수로 유리에 긁혔다고 한 것 같은데, 설마 그때 심하게 다친 걸까?’
채재욱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소익현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휴대폰 너머에서 장난기 넘치는 소익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차재욱? 이런, 나를 이렇게 보고 싶어해서야. 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또 전화한 거야? 난 가끔 네가 진이나 씨랑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를 좋아하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때도 있어.”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던 차재욱은 소익현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실없는 소리하지 마. 물어볼 게 있어.”
다소 진지한 그의 말투에 소익현도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왜 그래? 네가 그러니까 괜히 긴장 되잖아.”
“강서현의 혈소판 수치가 정상인보다 현저히 낮다는 걸 넌 진작에 알고 있었지?”
“그래. 왜?”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서현 씨가 나더러 너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한 거야. 네가 알면 아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서현 씨는 항상 아이 때문에 마음을 졸여왔었어. 아니, 잠깐만. 차재욱. 설마 이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건 아니겠지? 서현 씨가 아이를 낳고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는데, 지금까지 의심해 본 적이 없단 말이야? 에이, 네 성격으로 그럴 리가. 당시 진이나 씨가 저혈압이 왔을 때 넌 진이나 씨를 데리고 이곳저곳 의사를 찾아다녔잖아. 그런데 어떻게 매일 같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내에게 그런 병이 있는지도 몰랐던 거야? 쯧쯧쯧, 역시 진정한 사랑은 다르다니까? 서현 씨만 불쌍하지. 네 아이를 낳으려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까.”
이 말에, 차재욱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처럼 아파왔다.
소익현은 차씨 가문의 전담 주치의였다. 때문에 강서현이 몇 차례 부상을 당했을 때 전부 그가 치료해줬었다. 아이를 낳을 때도 그는 보조 의사로서 강서현의 옆에 있었다.
때문에, 차재욱은 그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강서현은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가 걱정할까 봐 진실을 숨긴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만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위해 차마 그에게 병세를 알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런 사실에 차재욱은 현재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강서현의 깊은 사랑과 믿음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진심까지 의심했었다.
‘어쩐지 나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 하더라니…’
이런 생각에 차재욱은 자신에게 욕을 몇 마디 하고는 즉시 휴대폰을 꺼내 강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가 한참 동안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차재욱은 차현승를 차씨 가문 저택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차를 돌려 강서현이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강서현의 휴대폰이 여러 번 울렸다. 전화가 걸려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바로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발신자를 확인한 이준은 강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받는 게 어때?”
“퇴근 후에도 학부모의 전화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어. 자, 내가 채소를 골라줄게. 콩이가 배고프겠다.”
강서현은 휴대폰을 소파에 놓고 이준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콩이는 TV를 보려고 리모컨을 찾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엉덩이를 비쭉 내밀고 소파에 올라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파 한구석에서 리모컨이 아닌 강서현의 휴대폰을 발견하게 되었다.
휴대폰 화면에 ‘차현승 아빠’라는 이름이 나타났었다.
콩이는 검은 포도 같은 두 눈을 크게 뜨고 휴대폰 화면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차현승이라는 이름은 콩이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은 잘생겼지만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오빠로 기억하고 있었다.
콩이는 망설임 없이 오통통한 작은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휴대폰 너머에서 한 남자의 다급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서현. 지금 네 집 아래에 있어. 내려와. 할 말 있어.”
콩이는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런 그가 아래층에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소파에서 기어 내려와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더니 주머니에 물건을 잔뜩 챙기고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차재욱을 발견하자, 새까만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이 났다.
콩이는 허둥지둥 차재욱 곁으로 달려가 팔을 벌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의 포옹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차재욱은 콩이의 이런 귀여운 모습에 바로 허리를 굽혀 콩이를 땅에서 안아 올렸다.
“네가 왜 내려왔어? 엄마는?”
콩이는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키더니 자신의 입을 콕콕 찔렀다.
“엄마가 요리를 하고 있어?”
차재욱은 바로 콩이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콩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재욱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마치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칭찬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귀여운 콩이의 모습에 차재욱의 마음속 응어리는 한순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는 심지어 이준을 질투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딸이 태어난 거지? 내 아들은 하루 종일 사고만 치고 다니는데…’
차재욱은 콩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처럼 말 잘 듣는 딸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는 일찍이 차현승이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당시 아기 용품을 살 때, 그는 모두 여자아이의 것을 사기도 했었다.
휴대폰 배경화면조차 귀여운 여자 아이 사진이었다.
하지만 장난이 심한 말썽꾸러기 아들이 태어났을 줄이야…
차재욱은 딸을 한 명 더 낳을까 생각도 하긴 했었지만, 강서현의 건강을 생각에 단념했었다.
콩이는 차재욱이 자기 말을 알아듣는 것을 보구 아주 기뻐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칭찬을 했다. 그러더니 포동포동한 작은 손으로 옷주머니에서 스티커를 꺼내 차재욱의 옷깃에 붙였다. 심지어 다정하게 그의 목을 껴안고 뽀뽀도 했다.
부드럽고 아기 특유의 우유향이 몰려오자 차재욱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신분과 전혀 맞지 않는 스티커를 보면서도 떼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값비싼 그의 핸드메이드 정장에는 캐릭터 스티커가 잔뜩 붙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재욱은 싫은 기색도 없이 어느 순간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잠시 후, 강서현은 식탁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콩이의 방문을 열고 밥을 먹으라고 외쳤다. 그제서야 그녀는 콩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방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콩이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었다.
순간, 잔뜩 당황한 나머지 강서현은 목소리를 높였다.
“콩… 콩이가 사라졌어.”
이준은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
“조급해하지 마. 혼자서는 멀리 갈 수 없으니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찾아보자.”
그렇게 두 사람은 앞치마를 벗을 겨를도 없이 집을 뛰쳐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차재욱의 품에 안겨 있는 콩이를 발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