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야 이 벙어리야. 감히 날 물어?”
강서현은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마침 딸이 한 어린 남자 아이의 팔을 꽉 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강서현은 서둘러 두 아이에게 달려갔다.
“콩이야. 사람을 물면 안 돼.”
그제서야 콩이는 남자 아이의 팔을 풀어주고 억울함이 깃든 눈빛으로 강서현을 빤히 쳐다봤다. 콩이는 작은 입을 가리키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치 나는 벙어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강서현은 가슴 아파하며 콩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네가 억울하다는 거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사람을 무는 건 옳지 않아. 자, 오빠가 얼마나 다쳤는지 같이 상처를 확인하는 건 어때?”
콩이는 억울했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콩이의 마음을 달랜 후, 강서현은 그제야 어린 남자 아이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아이에게도 몇 마디 위로의 말을 전하려는데 문득 그녀의 눈앞에 그녀가 밤낮으로 그리워했던 그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눈앞의 소년은 바로 강서현의 아들인 차현승이었다.
차현승을 마주 본 순간, 강서현은 순식간에 안색이 굳어졌다. 그를 달래려고 했던 말들이 목에 꽉 막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몇 년 전의 장면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차현승은 한껏 불쾌해하는 표정으로 강서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나쁜 여자야. 빨리 가. 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마. 난 다시는 당신을 엄마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이나 이모를 엄마로 삼을 거야.”
이혼했을 당시, 그녀의 아들인 차현승의 말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지푸라기마저 꺾어버리고 말았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배신당한 것만 해도 견딜 수 없는데, 그녀가 가장 아끼는 아들마저 자신을 버릴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강서현는 당시 어떻게 차씨 가문에서 나온 건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가슴속에서 말하지 못할 고통과 통증이 몰려올 뿐이었다.
4년, 두 모자는 4년만에 재회하게 되었다.
조금도 흥분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차현승의 얼굴에는 그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시 그녀를 쫓아냈을 때처럼.
강서현은 애써 모든 감정을 가라앉히고 한껏 엄숙한 목소리로 한마디했다.
“난 콩이 엄마야. 콩이가 네 팔을 깨문 건 콩이 잘못이야. 내가 콩이 대신 사과할게. 하지만, 네가 콩이를 벙어리라고 말하는 건 콩이에게 아주 큰 모욕이야. 그러니 반드시 콩이한테 사과해야 해.”
그 말에 차현승의 눈밑의 분노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강서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콩이는 벙어리가 맞잖아. 내가 뭘 잘못 말했어? 콩이도 당신처럼 나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난 절대 사과하지 않을 거야.”
차현승은 마치 패왕처럼 허리에 두 손을 얹고, 목을 빳빳이 치켜세우며 말했다.
바로 그때,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현승. 누가 너한테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쳤어?”
그의 한마디에 차현승은 온몸이 한순간에 굳어져버렸다.
잠시 후, 차현승은 그에게 팔에 있는 이빨 자국을 보여주며 고자질했다.
“아빠. 이 여자가 키운 딸이 제 팔을 이렇게 물었어요. 이것 좀 보세요.”
“차현승. 그래도 네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내가 평소에 그렇게 가르쳤어?”
차재욱은 굳은 표정으로 차갑게 한마디 했다.
하지만 차현승은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아니에요. 이 여자는 나쁜 사람이에요. 이 여자는 저 벙어리 때문에 저를 버렸다고요. 그러니까 전 절대 이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을 거예요.”
“차현승. 엉덩이가 또 간지러워서 그래? 빨리 사과해.”
차재욱의 한마디에 잔뜩 겁에 질린 차현승은 더 이상 감히 대들지 못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구고 미안하다고 별로 내키지 않아하며 한마디 하고는 뒤로 돌아서서 바로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한편, 차재욱은 천천히 강서현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콩이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아이가 네 딸이야?”
강서현은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오면 언젠가 차재욱과 재회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재회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그 목소리, 그 얼굴…
강서현은 순간 차씨 가문을 떠나던 그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날 병원에서 돌아온 그녀는 임신 사실을 차재욱에게 알리려고 했지만, 그녀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차재욱은 그녀에게 이혼 합의서를 건네주었었다.
강서현이 믿을 수 없어 그저 그가 농담을 하는 줄로 알고 있었을 때, 그녀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강서현, 이나는 나를 구하려다 허벅지를 크게 다쳐서 영원히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되었어. 만약 내가 이나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이나는 자살할지도 몰라. 그래서, 난 이나를 그저 가만히 내팽개칠 수 없어. 그러니까 우리 이혼해.”
그 말 한마디에 강서현의 모든 감정이 무너져내렸었다.
차재욱은 그의 첫사랑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와 이혼을 했었다. 하지만, 그는 강서현은 자기 때문에 영원히 그녀의 꿈을 펼칠 수 없게 되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
당시 강서현은 차재욱이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진이나의 대화를 듣고서야 그녀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재욱아, 당시 네가 강서현이랑 결혼한 건 다 나를 위해 재앙을 막기 위해서였잖아. 이제 네 기반이 확고해졌으니, 강서현은 더 이상 남아있을 필요도 없어. 혹시 강서현을 사랑하게 된 건 아니지? 그래서 차마 내쫓지 못하는 거야?”
당시 그 말을 들은 강서현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차재욱이 그렇다고 대답하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이내 차재욱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철석같은 단어가 마치 칼날과도 같이 강서현의 가슴에 꽂혀버렸다.
알고 보니, 차재욱은 그의 적으로 하여금 강서현이 그의 약점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진이나를 보호하려고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강서현은 어리석게도 차재욱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 강서현은 마음이 아파왔다. 그녀는 그때의 자신이 가엾게만 느껴졌다.
강서현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맞아.”
긍정적인 답변을 들은 차재욱의 눈빛은 왠지 조금 차가워졌다. 그는 옆에 늘어뜨린 두 손을 저절로 움켜쥐었다.
“강서현, 네 몸은 쉽게 임신할 수 있는 몸이 아니야. 아이를 낳으려다 네 생명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대체 그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길래 목숨까지 걸고 아이를 낳은 거야?”
그 말에 강서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그 남자가 얼마나 좋았길래 목숨까지 걸고 필사적으로 딸을 낳은 건지…’
강서현은 점쟁이에게 차재욱의 명줄에는 딸이 없는데, 만약 딸이 생긴다면 그가 순풍에 돛을 단듯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었다.
그래서 그녀는 딸을 낳을 수 있다는 민간요법을 찾아 몇 달 동안 몰래 한약을 마셨었다. 더 이상 아이를 낳기엔 무리라는 의사의 당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토록 차재욱을 사랑했지만 결국, 그에게 버림을 받고 말았었다.
순간, 강서현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이제 당신이랑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 것 같은데?”
그 말에 차재욱의 안색은 더욱 굳어졌다.
“강서현. 이게 다 너를 위해 한 말이야. 어쨌든 넌 현승이 생모니까 난 네가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강서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쓰지 마. 난 괜찮으니까. 만약 현승이가 치료를 해야한다면 내가 현승이를 데리고 학교 보건실에 찾아갈게. 필요하지 않다면 그럼, 난 이만 가볼게.”
“강서현.”
차재욱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강서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소리쳤다.
“잊지 마. 현승이도 네가 낳은 아들이야. 그런데 지금 네 딸 때문에 현승이를 아예 신경 조차 쓰지 않다니… 난 네가 이렇게 모진 여자인 줄 처음 알았어.”
그 말에 강서현은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사랑을 강구하려고 애써야 해? 현재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제일 좋지 않겠어?”
강서현은 허리를 굽혀 딸을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콩이야. 아빠가 우리를 데리러 왔어. 엄마가 새 직장을 구한 기념으로 같이 밥 먹으러 가자.”
그녀는 복도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이준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이준은 콩이의 손을 잡고 강서현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세 식구가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차재욱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강서현이 다른 남자와 아이를 낳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