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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차재욱은 그윽한 눈빛으로 강서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 말에 강서현은 콩이를 안고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강서현은 확실히 차재욱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옛 정이 되살아날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차재욱이 콩이의 정체를 알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만약 그가 콩이가 자기 딸이란 것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4년 전처럼 콩이를 그녀 품에서 빼앗아갈 것이다. 당시 강서현이 아들을 잃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어언 4년이 걸렸었다. 만약 또다시 딸을 잃게 된다면 그건… 그야말로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4년이란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해도 그 아픔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강서현은 차재욱을 눈빛을 피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당연히 현재의 내 삶을 방해할까 봐 두려운 거지. 4년 전 당신들이 나를 버렸던 순간부터 당신과 당신 아들과는 인연이 끊겨버렸어.” 강서현은 이제 차현승도 ‘당신 아들’이라고 지칭했다. 4년 전 버림받았던 얘기를 꺼낼 때에도 그녀의 말투에서는 아무런 파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4년 전 차씨 가문에서 비통하게 쫓겨난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차재욱은 이런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우리를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 어떻게 4년 후에 이렇게 차갑게 변할 수 있을까? 시간이 정말 모든 것을 잊게 만든 걸까? 하지만… 난 왜 아직도 강서현과 함께 했던 날들을 잊지 못하는 거야…’ 차재욱은 검은 눈동자를 드리웠다. “현승이는 당신이 목숨을 걸고 낳은 아들이니, 내가 잘 가르쳐서 제멋대로 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 하지만 그래도 당신 도움이 필요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지 않으면 현승이 담임 선생님으로서 일반 학부모가 선생님께 부탁하는 거라고 생각해줘. 응?” 그는 다소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의 이런 말투에서는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절박함까지 느껴졌다. 심지어 눈시울이 조금 붉어지기도 했다. 강서현은 이런 차재욱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차재욱이 정말 아들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서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이런 생각에 강서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현승이는 성격이 좀 퉁명스럽긴 하지만 구제불능은 아니야. 수학에 관심이 많고 문제 풀이 방법도 참신하니 수학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볼게. 아이를 변하게 하려면 부모가 전적으로 협조해줘야 해.” 강서현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차재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 꼭 최선을 다해 협조할 테니까.” “자, 됐으니까 이만 돌아가 봐.” 강서현은 다시 한번 그를 내쫓았다. 이젠 차재욱이 가고 싶지 않아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콩이의 얼굴을 한 번 꼬집으며 말했다. “경성에 온 목적이 김 박사님께 진료를 받기 위해서라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김 박사님은 워낙 바빠서 시간을 예약하기가 쉽지 않을테지. 내가 김 박사랑 친분이 있으니 콩이를 도와줄 수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어쨌든 현승이 여동생이니까 단지 현승이에게 이 세상에 또다른 가족을 남겨주고 싶은 것 뿐이야.” 강서현이 거절하려고 하자, 이준이 그녀를 제지했다. “대표님, 콩이를 위해 이렇게 고생해주시니 저와 현이가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이’라는 호칭은 마치 칼날처럼 차재욱의 가슴을 찔렀다. 그건 한때 그가 강서현을 부르던 호칭이었다. 두 사람이 스킨쉽을 할 때마다 그는 강서현의 귓가에 ‘현이야’라고 다정하게 속삭였었다. 그러면 강서현도 ‘여보’라고 대답했었다. 이런 생각에 차재욱은 가슴이 아려왔다. 잠시 후,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 모습에 콩이는 잽싸게 강서현의 품에서 벗어나 접시에서 찐빵 두 개를 집어들고 그를 쫓아갔다. 차재욱이 막 문을 열려고 할 때, 포동포동한 작은 손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콩이는 손에 곰돌이 모양의 찐빵 두 개를 쥐고 눈을 끔벅거리며 차재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먹으라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그런 콩이의 모습에 차재욱의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자신이 의기소침해 있을 때, 누군가 자신에게 위로를 건넬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찐빵 두 개를 건네받고 콩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넌 네 엄마보다 훨씬 인간미가 있어. 어서 밥 먹으러 가. 아저씨는 오빠를 돌보러 이만 집에 가야 해. 오빠는 아직 집에서 반성문을 쓰고 있거든.” 그 말에 콩이는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며 그를 향해 손을 내젓더니 손키스까지 날렸다. 그 모습에 차재욱은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졌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말을 못하는 건 너무 애석한 일이야. 부디 내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말을 마치고, 그는 콩이의 얼굴을 한 번 꼬집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콩이가 애써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콩이는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강서현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왜 아저씨를 쫓아내느냐고 원망하는 듯했다. 잠시 후, 강서현은 콩이에게로 걸어가 콩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콩이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한마디 했다. “콩이야. 아저씨는 집에 가서 오빠를 돌봐야 해. 오빠가 혼자 외럽게 집에 있는 건 콩이도 싫지?” 그 말을 들은 콩이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현승은 비록 콩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콩이는 그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잠시 후, 콩이는 짧은 다리로 의자에 올라가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딸이 이렇게 차재욱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고 강서현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두 번 만났을 뿐이었다. 심지어 많은 교류도 하지 않았는데, 차재욱에게 이렇게 의지하다니… 만약 두 사람이 앞으로 더 많은 접촉을 하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지 강서현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 차재욱은 아주 총명한 사람이니 분명 콩이의 정체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강서현의 수심에 찬 표정을 보고 이준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됐어. 이제 아무 생각도 하지 마. 현재로서는 콩이의 병을 고치는 것이 최우선이야. 차재욱이 김 박사님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으니 그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차재욱이 너와 내 사이를 오해하고 있으니 그냥 계속 오해하게 놔둬. 어쨌든 콩이의 현재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좋은 가정 분위기가 필요하니까. 삼촌이 아빠가 된다고 해도 난 상관 없어.” 그 말에 강서현은 난처해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앞으로 네 혼삿길이 막힐까 봐 걱정이야. 나이도 적지 않은데…” 이준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누가 나이가 적지 않다고 그래? 고작 너보다 한 살 많을 뿐이야. 어릴 때 네가 나를 보호해줬으니 이젠 내가 널 지켜줄게. 넌 영원히 내 여동생이야.” 강서현은 어릴 적 자신이 이준의 뒤를 쫓아다니며 오빠라고 부르던 장면이 문득 생각났다. 부모님이 출근을 하게 돼 그녀를 돌볼 시간이 없게 되자 그녀는 시골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었다. 그곳에서 이준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가 괴롭힘을 당했을 때, 이준은 항상 오빠처럼 그녀를 지켜주었었다. 나중에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식을 잃은 슬픔에 할머니마저 돌아가게 되자 강서현은 완전히 고아가 되어 보육원으로 보내졌었다. 그렇게 그 이후로 이준과는 연락이 자연스럽게 끊기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강서현이 차씨 가문을 떠나 슬픔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준은 그녀에게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한명 더 있다는 것을 다시 믿게 해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콩이가 갑자기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에서는 경제 뉴스를 보도하고 있었다. 차재욱이 세계적인 갑부의 신분으로 브라운관에 등장했다. 강서현이 막 채널을 돌리려고 할 때, 콩이가 맨발로 텔레비전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다가 화면에 나타난 차재욱에게 뽀뽀를 하더니 천천히 한마디 했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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