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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여민석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리를 뜨려던 유소정은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은서 씨, 제가 은서 씨라면 빨리 병원에 가서 폐쇄 주사를 맞았을 거예요. 하이힐을 신느라 피곤해서 발이 아픈 거예요. 월요일까지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휠체어를 타고 방송에 나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백은서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여민석은 곧장 백은서를 안아 들었는데 굳어 있던 얼굴에 온화함이 돌았다. “걱정하지 마. 지금 당장 병원에 가자.” “석아, 고마워.” 백은서는 그의 가슴에 기대어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 유소정은 그들에게 길을 내주려다가 여민석의 팔에 부딪혔다. 어깨에 통증이 밀려왔지만 유소정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래층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눈가에 고인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분명 예상했던 장면인데, 연약한 심장이 너무 아프다는 걸 그녀는 절실하게 느꼈다. 유소정은 천근만근이 되는 듯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띵.” 침대에 누워 흐리멍덩히 잠이 들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유소정은 허우적거리며 휴대전화를 잡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미오야, 아직도 별장에 있어? 언제쯤 돌아올 거야?” 안청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전화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유유히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너 유씨 가문을 도와주는 게 아니었어. 그들은 너의 생사를 상관한 적이 없지만, 오히려 너에게 이렇게 조건 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거야? 양심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뭘 알아냈어?” “유씨 가문이 요즘 경영상황이 매우 좋지 않아. 최근 분기 재무제표가 적자를 많이 냈고, LS그룹으로부터 압류된 약재들이 돈을 벌어도 적자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야.” 안청하는 조사 결과를 별로 알리고 싶지 않다. 유소정도 그동안 LS그룹 덕분에 번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었다. 왜 아직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건지 너무 궁금했으니 말이다. “미오야, 유산 조리 중이니 돌아와서 몸 좀 추스르고 나서 다시 얘기할까?” 안청하는 여씨별장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이 유소정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득했다. “몸 다 추스르고 나서 네 분이 풀릴 때까지 혼내주자. 어때?” 유소정은 마른 침을 삼켰다. 눈시울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응, 월요일에 녹화가 끝나면 바로 갈게. 할아버지가 우리를 지켜보고 계셔서 당분간은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돼.” 유소정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안청하는 화가 치밀어 그녀를 대신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할아버지 친손자는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혈연관계가 없는 손자며느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여민석 그 개자식이 너를 괴롭히기만 한데 넌 그를 사랑하기만 하잖아!” “그래, 모레 녹화 끝나고 쇼핑하자.” 유소정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안청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몸조리 잘해.” 전화를 끊은 후 유소정은 몸을 웅크린 채 침대에 누웠다. 커다란 침대였지만 그녀는 한쪽 귀퉁이에만 누워 있어 아무리 봐도 서글프기만 했다. “띵.” 카드 입금 문자를 지켜보던 유소정의 슬픔이 싹 풀렸다. 그녀가 일부러 백은서를 속인 이유는 돈을 좀 벌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료로 유영제약을 광고하기 위해 서기도 했다. 여민석이 백은서를 안고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이 이틀 동안 유소정은 자신을 방에 가두고 이번에 출연할 노인의 자료를 요청해 알약과 약선을 연구했다. 월요일 아침, 유소정은 세련된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날씬한 허리와 자랑스러운 몸매가 타이트한 옷에 돋보였다. 황금비율의 몸매에 몸에 딱 붙는 부드러운 원단은 그녀의 군살 하나 없이 완벽한 몸매를 드러냈다. 유소정은 가방을 메고 그녀를 데리러 왔다는 명색으로 찾아온 여민석과 백은서를 쳐다보았다. “차에 타.” 여민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소정이 거절하려 하자 그가 또 한마디 했다. “할아버지한테 한 소리 듣고 싶은 거라면 지금 당장 택시 타러 가도 돼.” 유소정은 입술을 깨문 채 스스로 문을 열고 운전석 뒷좌석에 앉아 인사했다. “그럼 실례할게요, 출발해요.” 여민석은 백미러로 유소정을 흘끗 보았다. 피부가 희고 매끄러운 이목구비를 대부분을 가렸지만 맑은 눈매에서 그녀의 선의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 조금도 거리낌 없이 그를 운전사로 여기고 있다! "소정 씨, 오늘 저희와 함께할 다섯 분이 개국공신이신데 다들 서로 다른 아픔을 갖고 계세요. 자료 아직 못 보셨죠?” 백은서는 열정적으로 조수석에서 자료를 나눠줬다. 유소정은 그런 그녀를 흘끗 보았다. 백은서가 이러는 건 여민석에게 그녀가 얼마나 온화하고 대범한지 보여주고 싶어서였고, 과거의 원한을 따지지 않고 그녀를 돕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필요 없어요. 구정혁 대표님이 이미 보내 주셨어요.” 유소정은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백은서 씨는 벼락치기를 좋아하나 봐요?” 백은서는 난감한 얼굴로 내밀었던 손을 어색하게 거두어들였다. 여민석의 따뜻한 손바닥이 백은서의 작은 손을 감싸며 차갑게 말했다. “그냥 얼핏 나올 사람인데 그렇게 잘해줄 필요 없어.” 백은서는 상처를 받은 듯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곤함을 느낀 유소정이 고개를 다시 돌려 정면을 바라보다가 마침 백미러에서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듯한 여민석의 눈빛을 보았다. 마치 그녀가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우습게 만든 것을 탓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유소정은 시선을 거두며 그의 눈빛을 못 본 척했다. 서울 고급 요양원. 검은색 마이바흐가 주차장에 주차하자 유소정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푸른 산과 물이 어우러진 이곳은 공기마저 자연의 냄새를 풍겼다. 이들이 가져온 옷가지와 짐을 따로 검사한 뒤 그들은 비로소 요양원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들이 들어설 때 구정혁은 일찌감치 스태프들을 이끌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소정을 보자 구정혁은 지체없이 달려와 그녀에게 아침밥을 건넸다. “미오 씨, 아침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으면 아침부터 먹고 촬영할까요?” “구정혁 대표님, 이분은 다음 여자친구인가요?” 백은서는 새하얀 원피스에 미들 굽 구두를 신은 채 검고 긴 머리카락을 어깨에 늘어뜨렸다. 햇빛 아래 서 있는 그녀는 갓 졸업한 소녀 같았다. 여민석은 싸늘하고 언짢은 눈빛으로 유소정을 힐끗 보더니, 갑자기 그녀가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던 그 날의 말을 떠올렸다. 구정혁은 안색이 어두워진 여민석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은서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유소정에게 다가갔다. “미오 씨, 먼저 앉아봐요. 녹화 절차에 대해 말해줄게요.” “이 프로그램은 3일 동안 녹화해야 해요. 예고편이지만 하룻밤을 묵어야 해서 이 요양원은 우리가 책임지기로 했어요. 녹화에 참여한 분들이 전부 개국 공신들이라 신변 안전이 매우 중요해요. 그래서 녹화 중 다른 사람은 이 주변에서 어슬렁거릴 수 없어요, 유미오 씨, 이해하겠어요?” 유소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달걀을 까면서 구정혁의 말을 들었다. 여민석은 한쪽에 방치된 채 웃으며 대화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불쾌했다. 예쁘게 깐 달걀을 구정혁에게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불편해진 그는 유소정이 달걀을 다 벗기자 여민석은 잽싸게 걸어가 달걀을 낚아채 입에 넣었다. 유소정은 거칠게 달걀을 한입에 삼키는 여민석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배가 고팠나?’ 갑자기 누군가 재빨리 달려왔다. “구정혁 대표님, 유소정 씨의 캐리어에서 금지품이 발견되었으니 검사에 협조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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