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이천만 원.”
여민석은 안색이 좋지 않은 채 그녀와 흥정을 벌였다.
문 앞으로 다가온 유소정은 잠시 걸음을 옮기고 휴대전화를 꺼내 안청하와 함께 공동개설한 공개계좌를 보여줬다. “이리로 이체해줘요, 고마워요.”
여민석은 멍해졌다. 그녀가 영업적인 미소를 띠는 걸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았다.
어쩐지 이 여자가 아주 시원시원하게 가출하더라니, 사기 치는 돈이 보통 사람 연봉보다 많아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계좌이체를 마치자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유소정은 꽃처럼 활짝 웃으며 부드럽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요.”
“또 무슨 꿍꿍이 수작이야?” 여민석이 불만스럽게 물었다.
유소정은 문 앞으로 가서 벽에 기대어 앉더니 가지고 있던 은침을 빼내어 부기를 찔렀다. 더부룩한 발목 부근의 태계혈, 대종혈, 삼음교혈 등을 찔러 통증을 막았다.
아프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유소정은 일어나서 방으로 돌아갔다.
“석아, 이따가 마사지 받고 얼음찜질해야 하는데 아이스팩 좀 가져다줄래? 고마워.” 백은서가 자연스럽게 분부했다.
여민석은 원래 유소정에게 분부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백은서에게 마사지를 해주려고 그럴듯하게 준비하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당장 갔다 올게.”
이 말은 유소정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백은서를 괴롭힐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이다.
유소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에 그녀는 억지나 부리는 사람으로 보였던 걸까?
백은서는 침대에 편안하게 누운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소정 씨, 수고해주세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아까 침대에서 너무 피곤해서 손놀림이 서툴지도 몰라요. 이해해주세요.” 유소정은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앉아서 백은서의 발을 들어 올렸다.
그 말을 들은 백은서는 황급히 발을 빼려고 했지만, 결국 유소정에게 붙잡혔다.
갑자기 ‘삐걱'하는 소리가 났다.
백은서는 너무 아파 얼굴이 창백해졌고, 예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백은서 씨 왜 그렇게 흥분하세요? 전 남편이랑 결혼한 지 3년 됐는데 뭔가 애틋한 일을 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요? 설마 백은서 씨는 남자친구에게 다른 욕구가 필요 없는 거예요?” 유소정은 아픈 마음을 참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거두어 소독 티슈로 닦았다.
백은서는 깨끗하고 예쁜 손으로 시트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갑자기 방금 유소정이 여기 누워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구역질이 났다.
손을 깨끗이 닦은 유소정은 일어서며 말했다. “백은서 씨, 발을 먼저 냉찜질하세요. 마사지부터 하면 이렇게 완벽한 발을 영원히 못 쓸지도 몰라요.”
“유소정 씨, 고마워요. 전 남자친구랑 결혼을 안 했으니 다른 짓을 할 리도 없겠죠. 하지만...”
백은서는 입꼬리를 씩 올리고 자신 있게 웃었다. “석이가 구씨 가문에서 밀고 있는 최신 주말 의학프로그램에 거액을 주고 계약해줬어요. 석이의 믿음이 있고 내 의술이 더해지면 방송을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방송을 시작도 하기 전에 많은 네티즌이 석이가 나와 함께 녹화해주길 기대하고 있네요.”
“하하, 그들이 내 의술을 보려는 건지, 아니면 나와 석이가 깨를 볶는 모습을 보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웃을 때 입가에 보조개 두 개가 생겼는데, 이렇게 달콤한 얼굴이 그녀의 의기양양한 태도로 속물적으로 보였다.
유소정은 소독용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심장에 통증이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민석이 백은서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어찌 그녀뿐일까?
“소정 씨, 소정 씨는 착한 사람이라 지난 번처럼 주가에 영향을 주는 일은 하지 않겠죠?” 백은서가 고개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유소정을 부드럽게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유소정의 남편이라고 해도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듯했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쓸모없다.
그러니 유소정은 쓸모없는 사람이다.
막 나가려던 유소정은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도도하게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럼요, 당연히 착하죠. 내가 방송에 나와 한마디라도 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면 LS그룹의 주가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백은서는 양손으로 자기도 모르게 시트를 꽉 쥐었지만, 아름다운 작은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내지 않았다. “가고 싶으면 당연히 가장 좋겠지만 이 프로그램의 문턱이 너무 높아요. 소정 씨는 자격이 없긴 하지만 제가 구정혁 대표님에게 부탁해서 소정 씨가 녹화에 얼굴 정도는 비추게 해 방송에 나오는 소원 정도는 이루게 할 수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당신 말은 힘이 없지 않을까요? 전 그래도 LS그룹의 작은 사모님인데 그렇게 아무렇게나 나가서 얼굴을 내밀 수 있겠어요? 게다가, 설령 은서 씨말이 힘이 있다고 해도 내 남편은 원하지 않을 거예요.” 유소정은 일부러 슬픈 척하며 힘들고 괴로운 감정을 호소하는 척했다.
“뭘 원하지 않는 다는 거야?” 여민석이 아이스팩을 들고 들어왔다.
백은서는 일어서서 깡충깡충 뛰며 지나가려 했지만, 여민석이 한발 앞서 그녀 곁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천천히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막 움직이면 어떻게 해?”
“소정 씨가 의술을 보여주는 게 부럽고 방송에 나가고 싶다고 해서 용기를 북돋아 줬는데 싫다고 하더라고.” 백은서는 노래하듯 말을 예쁘게 했는데 목소리는 꾀꼬리 소리처럼 듣기 좋았다.
여민석의 위엄있고 혐오에 찬 눈빛이 유소정에게 떨어졌다. 그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백은서를 이용하려 하다니.
문 앞에 조용히 서 있던 유소정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떠돌이 강아지 같아 보여 여민석은 혐오에 찬 눈빛을 거둬들였다.
백은서는 그의 건실한 팔에 기대어 손을 꼭 잡은 채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석아, 소정 씨에게 기회를 주면 안 돼?”
“빨리 은서에게 고맙다고 인사하지 않고 뭐해?” 여민석은 턱으로 유소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유소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뭇거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민석은 사람을 믿지 않는 유소정의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휴대폰을 꺼내 구정혁의 번호를 누르고 영상통화를 걸었다.
“하이, 민석, 너 마음 바꾼 거 아니지?” 구정혁이 까불며 물었다.
여민석은 정색을 하고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유미오를 게스트로 초대한다는 계약서를 보내줘.”
“뭐?!” 구정혁은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여민석이 핸드폰 카메라 방향을 돌리자 빛을 거슬러 문 앞에 서 있는 유미오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면... 유미오가 몸으로 여민석을 설득했단 말인가?
방금 유미오에게 전화를 걸어 계약하려 했던 건 사실이지만 기회가 뜻밖에 너무 빨리 찾아왔다!
“구정혁 대표님, 불편하세요?” 유소정이 부드럽게 떠보듯 물었다.
놀란 구정혁은 얼른 표정을 바로잡고 흥분하며 말했다. “당연히 불편한 거 아니죠, 지금 당장 계약서를 보낼 테니 유미오 씨 먼저 서명하세요.”
유소정은 다가가서 여민석의 핸드폰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순간 두 사람의 손가락이 실수로 닿았고 조금 차가운 손끝에 여민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적게 입은 것은 감기에 걸리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뜻인가?’
‘정말 꿍꿍이 수작이군!’
유소정은 속도가 늦으면 그들이 번복할까 봐 두려운 듯 계약서를 보지도 않고 재빨리 자신의 이름을 사인했다.
유소정의 난처한 모습을 보려 했던 백은서는 멍해졌다. 유소정이 1분도 안 돼 계약을 끝냈는데 일부러 기회를 준 그녀의 화를 돋우려는 것 같았다.
사인을 마친 유소정은 휴대전화를 건네며 말했다. “여민석 씨, 수고스럽지만 여민석 씨도 서명 좀 해주세요.”
휴대전화를 넘겨받은 여민석은 배우자의 사인임을 흘끗 보았지만 별생각 없이 곧바로 사인했다.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우상이 프로그램에 출연시키지 못하도록 여민석이 결정을 번복할까 봐 구정혁이 일부러 설정한 것이다.
“OK, 계약 완료, 다음 주 월요일에 먼저 요양원에 와서 예고편을 녹화하면 돼요. 석이 형, 그때 사랑하는 아내인 내 우상을 꼭 데리고 와!” 구정혁은 여민석 옆에 백은서가 있는 줄도 모르고 놀려댔다.
우상과 함께 일할 생각을 하니 구정혁은 너무 기뻐 날아갈 것 같았다.
백은서는 유소정을 힐끗 바라보다가 차가운 눈빛을 짓더니 여민석의 손을 잡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석아, 나 발이 너무 아픈데 소정 씨가 계속 마사지 해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