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지 회장과 잠시 이야기를 한 정지연은 곧바로 떠났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하철이 있어 오가기가 편했다. 정지연도 막 가려는데 검은색 고급 스포츠카가 별안간 그녀의 곁에서 멈췄다.
정지연은 뒤로 한 발 물러섰지만, 스포츠카의 조수석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요.”
운전석에 있는 남자는 주민환이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신혼의 남편도 못 알아보는 겁니까, 정 교수?”
주민환은 냉소를 흘렸다. 말투에는 조롱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일부러 밀당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할 게 분명했다.
잠시 멈칫한 정지연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차에 탔다.
“안녕하세요, 주민환 씨.”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넨 그녀는 안전벨트를 했다.
흘깃 그녀를 본 주민환은 조용히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디로 갑니까?”
“A대요.”
정지연은 쓸데없는 말 없이 대답했다.
그리하여 차는 조금 어색할 정도의 적막을 유지한 채 아주 긴 거리를 주행했다.
함께 하는 두 사람이 막 혼인신고를 마친 신혼부부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 주민환의 낮은 목소리가 별안간 울렸다.
“정 교수님, 지나간 과거는 묻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계약 결혼이긴 하지만 혼인 유지 기간에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스캔들은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바람, 주민환 씨에게도 적용되는 거예요?”
정지연은 시선을 내린 채 반문했다.
그녀를 흘깃 본 주민환은 냉소를 흘렸다.
“물론, 바람대로 해드리죠.”
정지연은 믿지 않는 듯 코웃음을 쳤다.
믿을 리가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바로 얼마 전에 어느 한 글로벌 스타와 스캔들이 났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재벌가 자제와도 스캔들이 터진 뒤에는 또 어느 도박왕의 딸과 소문이 있었다.
“정 교수님은 심리학 전공입니까? 사람에 대해 아주 잘 아시네요.”
정지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저에 대해 조사하셨었잖아요, 주민환 씨”
주민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여자의 청량하고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알아요. 이 결혼에 대해 주민환 씨는 내켜 하지 않겠죠, 어쩌면 강요당한 걸 수도 있고요. 걱정마세요, 우리는 계약서에 적힌 대로 삽시다. 나중에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아무 조건 없이 자리 비워드리죠.”
“제가 주민환 씨와 결혼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저희 둘 모두 애인은 필요하진 않으나 결혼은 필요했으니 윈윈할 수 있게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그냥 저를 협력 파트너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지연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이 남자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좋게좋게 협력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정 교수님 주변에 괜찮은 남자들이 많을 텐데, 왜 굳이 저였습니까.”
냉담하게 묻는 주민환은 정지연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은 듯했다.
“굳이 주민환 씨여야 했던 건 아닙니다. 그냥 지금 상황에선 주민환 씨가 제일 적당했던 거죠. 주민환 씨는 아주 뛰어나신 분이시죠. 전 저 스스로 곤경을 헤쳐 나가려고 해도 아무나와 손을 잡을 수는 없죠.”
정지연은 아주 침착하게 해석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머니에 있던 휴대푠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한 그녀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 선생님?”
전화 너머로 강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지연 씨, 문 회장님 병세가 빠르게 악화되고 있어서 저희는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문씨 가문 쪽에서는 회장님께서 조금이라도 평온하게 보내면서 이미 치료를 포기하셨습니다.”
정지연은 긴 손가락으로 이마를 누르더니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문 회장, 문기헌은 그녀에게 잘해주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문씨 가문은 이 은혜를 이용해 그녀를 묶어둔 뒤 그녀를 착취하려 했다.
진짜 딸을 되찾기 전, 가짜 딸이었던 그녀는 사실 이미 문씨 가문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문씨 가문에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정지연을 문씨 가문의 소유물로 여기며 강제로 통제하려 했다.
탐욕, 시기, 악랄함, 음험함은 그들이 보여준 인간성이었다.
“주민환 씨, 당신의 말대로 이 모든 건 그저 하나의 계약일 뿐이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죠.”
휴대폰을 넣은 정지연은 평온하게 주민환에게 말했다.
주민환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정지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앞쪽 큰 골목에서 내려주세요.”
그녀를 보는 주민환의 두 눈에 의아함이 드러났다.
“주민환 씨, 이 결혼 비밀로 하자면서요? 차가 좀 눈에 띄어요.”
정말 세심한 배려에 고마울 지경이었다.
이내, 주민환은 차를 갓길에 세웠다.
“고마워요. 신혼 축하드려요, 주민환 씨.”
청량한 목소리와 함께 차 문도 닫혔다.
담배에 불을 붙인 주민환은 무심하게 담배를 피우며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정지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신혼 축하?
대체 축하할만한 신혼이 어디에 있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