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이세빈의 얇은 입술이 움직이자 차가웠던 기운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는 조용히 소매를 여미며 대답을 기다렸다. 마치 조금 전의 냉기는 강서우의 환상에 불과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기꺼이 듣고자 한다면, 강서우도 기꺼이 말할 생각이었다.
“강성 그룹은 서경시에서 3대를 이어 온 가문으로 이곳의 문화와 전통을 잘 이해하고 있어요. 이신 그룹이 풍족한 자금력으로 강영 파크를 서경시에서 가장 독특하고 상징적인 지역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면, 거리의 통일성과 문화적 융합이라는 면에서 강성 그룹은 반드시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을 거예요.”
비록 강서우는 강성 그룹에 몸담고 있지 않지만, 과거 강성 그룹이 어려웠을 때 어머니가 만든 도자기로 버텨 냈다는 사실은 늘 잊지 않고 있었다.
강성 그룹 또한 어머니의 심혈이 깃든 사업체였고, 이 프로젝트만큼은 꼭 손에 넣고 싶었다.
이세빈은 강서우가 이야기하는 동안, 그녀의 칙칙해 보이던 눈동자에 생기가 감도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다른 남자의 새가 되어 새장 속에 갇혀 있던 모습보다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느꼈다.
어느 순간, 그가 미소를 살짝 지었다.
강서우가 열정적으로 말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이세빈이 거의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음을 보게 됐다.
그 순간 강서우의 기억 속에 희미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누군가 이런 따뜻한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봐 줬던 것 같았다. 그 기억을 더듬으려다 목소리가 도중에 끊겨 버렸다.
이세빈은 마치 현실로 돌아온 듯 입술에서 미소를 지우고 나직이 물었다.
“왜 말을 멈춰요?”
“혹시... 저희 예전에 만난 적 있나요?”
강서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세빈을 유심히 살폈다.
무언가 익숙한 부분을 찾아 과거 기억과 맞추고 싶었지만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머릿속은 흐릿했다. 다 낡고 빛바랜 사진처럼 구석구석이 희미해져 본래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강서우는 한참이나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세빈은 잠시 기다려주다가 그녀가 떠올리지 못한 건 같아지자 먼저 입을 열었다.
“강영 파크 프로젝트 허락할게요.”
강서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직 말을 다 못 끝냈는데 벌써 허락을 받았으니 말이다.
‘혹시 프로젝트 내용보다 내가 정략결혼을 했기 때문에 들어준 건가?’
그녀는 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본질적으로 정략결혼은 이익을 주고받는 자리니 말이다.
강서우는 방금 전 떠오른 의문을 한쪽에 잠시 내려놓고 진지하게 한 걸음 다가섰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세빈 씨. 대가로 세빈 씨도 저한테 뭔가 해 달라고 해도 돼요.”
이세빈은 아무 말 없이 입술만 꽉 다물었다.
그녀가 지난 일을 기억 못 하는 건 확실해 보였고, 그 대신 지금은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있었다.
똑똑.
그때 문밖에서 도우미가 노크했고, 뒤에는 비서 문석천이 따라 와 있었다.
이세빈과 강서우가 동시에 문 쪽을 바라봤다.
강서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일이 있으면 먼저 가도 돼요. 나머지는 저 혼자서 할게요.”
처음 만나기도 했고, 더 붙잡아 두기 싫었다. 이세빈의 입장에서도 집주인이 내보내니 계속 남아있기 이상했다.
“그래요.”
이세빈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답한 뒤 문석천을 따라 자리를 떴다.
커다란 창 너머로 강서우는 이세빈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도자기 포장을 하나씩 풀어 정해 둔 진열장에 가지런히 놓으려고 몸을 숙이던 찰나, 창틀 쪽에 놓인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싱그런 새잎이 돋아나고 탐스러운 꽃잎이 피어난 화분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예전에 강서우가 좋아하던 희귀종과 완전히 똑같았다.
“도우미들이 신경을 많이 써 줬네.”
강서우는 감탄을 내뱉었다.
과거 유송아가 그녀의 꽃을 뽑아내던 행동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세빈의 도우미들은 정성껏 그 희귀한 새싹을 길러 놓은 모양이었다.
강서우에게서 후원까지 받던 유송아는 결국 그녀를 배신했다. 반면 정략결혼으로 이어진 이씨 집안 도우미는 그녀가 좋아하는 걸 세심히 준비해 줬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지...’
강서우는 꽃들을 더 구경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어머니의 도자기 포장들을 하나씩 풀고 깨끗한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때 강준하의 전화가 걸려 왔고 목소리에 날카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 대표랑 어떻게 돼 가는 거냐? 그 집안 사람은 만났어? 아니면 바로 혼인신고부터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