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혈연이라는 건 참으로 신기했다. 경찰서에 갇혀 있는 청소년이 열 명 남짓, 그중 여학생도 서너 명이나 되었지만 임유나는 단번에 등지고 앉아 곱슬머리를 한 소녀가 자신의 딸임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 옆에 갈색 머리와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었다. 그가 바로 전화에서 차를 사주겠다고 했던 한규진일 터였다.
임유나는 이미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상태였다.
한규진의 아버지가 도박 빚을 졌고 채권자들이 한규진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강로이가 한규진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강로이에게 빚을 갚으라고 압박한 것이다.
한규진은 이를 거부했지만 그 무리는 그의 휴대폰을 빼앗아 강로이에게 전화를 걸었고 강로이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다.
레스토랑에 도착한 강로이는 한규진의 멍든 얼굴을 보며 속상해했고 돈을 갚아주겠다고 했지만 먼저 한풀이를 해야 한다며 한규진을 때린 사람에게 벌을 주겠다고 했다.
강로이는 성격이 급해 말을 마치자마자 술병을 들어 한규진을 위해 복수하겠다며 나섰고 그 틈에 레스토랑 주인은 사태가 심상치 않자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 젊은이들이 혹시나 사람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레스토랑 운영이 어려워질 수 있으니 말이다.
마침 학교 근처라 이곳에 경찰서가 있었고 경찰이 곧바로 달려와 그들을 연행해 조사를 시작했다.
때린 쪽은 이미 경찰 상대 경험이 많아 대처 요령이 있었다. 강로이도 일이 커질까 봐, 특히 한규진에게 문제가 될까 봐 우려하고 있었다.
양측이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기에 경찰 측에서는 훈계로 끝내기로 했다.
강로이가 미성년자라 경찰은 부모에게 연락하라고 했고 강로이는 김 집사 번호를 불러주었다.
임유나를 본 경찰은 그녀가 강로이의 언니라고 생각했지만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다.
집안에서 아이가 사회 부적응자들과 어울리지 않도록 잘 지도를 해달라는 뉘앙스로 얘기를 전했다.
임유나는 사인하고 경찰이 그녀를 강로이에게 데려다주었다.
“강세연 양, 보호자가 오셨습니다.”
강로이의 본명은 강세연이었다.
임유나는 안에서 딸이 묻는 소리를 들었다.
“저 혼자만 보석되나요?”
김 집사에게 자신과 한규진 둘 다 보석하라고 했는데 말이다.
한규진의 엄마는 몸이 좋지 않았기에 경찰서에 와서 아들을 데리고 가다가 병이 나면 어떡하겠는가?
“그래요. 빨리 나와요.”
경찰이 재촉했다.
강로이는 옆에 있던 한규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나가서 너도 데리고 나갈게!”
임유나는 창문으로 딸이 한규진에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한규진은 땅을 내려다보며 무기력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임유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날 전화에서 강로이가 언급했던 한규진이란 이름이 마음에 걸려 미리 알아본바, 한규진은 강로이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가정 형편은 평범하지만 공부를 잘하고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학생이었다.
강로이는 그를 잘 챙겨주었다. 좋은 친구라며 가장 소중하게 여겼지만 그녀의 마음에 품은 호감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속일 수 없는 법이었다.
강로이의 짝사랑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미 눈에 띄고도 남는 것이었지만 아무도 그 마음을 들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법이었다. 임유나가 보기에는 한규진이 단순히 보이는 대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이 부분은 좀 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임유나는 이미 지나온 사람으로 청춘 남녀의 사랑을 억지로 떼어놓는 것이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갑자기 나타난, 그들과 감정적으로 깊지 않은 엄마이기에 함부로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이 아니었다.
“김 집사, 그런데 규진이는 어쩌죠?”
밖으로 나오자마자 강로이는 다급하게 김 집사에게 한규진을 보석하라고 재촉했다.
“뭐 하고 계신 거예요? 제 말 안 들리세요?”
강로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김 집사의 시선이 자신의 뒤쪽을 향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뒤돌아보니 그제야 임유나가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강로이에게 거의 없었다. 사진으로 본 얼굴도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졌다.
그녀는 임유나에게서 특별한 걸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이 젊은 여자가 경찰서에 온 어느 나쁜 놈의 가족이 아닐지 생각했다. 그런 집안에서 이렇게도 예쁜 사람이 나오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특유의 기품과 외모는 눈에 띄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거둔 강로이는 김 집사를 다시 재촉하려 했는데 그때 김 집사가 방금 그녀가 봤던 여성을 향해 공손히 ‘사모님’이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강로이의 표정이 굳었다.
‘사모님?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뜻은 아니겠지?’
임유나는 김 집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이제 가자고 손짓했다. 한규진을 보석하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남의 집 자식 문제까지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강로이 옆을 지나 앞서 걸어가는 임유나의 뒤를 김 집사가 따랐다. 멀어져가는 임유나의 뒷모습을 보며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지려 하자 강로이는 급히 달려가 그녀를 따라잡았다.
‘제기랄, 이 여자가 왜 따라온 거지!’
자신이 웃음거리가 된 것처럼 느낀 강로이는 기분이 몹시 나빴다. 싸움도 하기 전에 이미 밀리는 기분이었다.
강시후가 자주 타는 비즈니스 차량에 임유나가 오르자 강로이도 얼른 따라 뒷자리에 앉았다.
“우리 아빠랑 결혼하신 거예요?”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강로이에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한규진은 이미 뒷전이었다.
이윤아의 전화를 받았을 때, 강로이는 아빠가 단순히 여자친구가 생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새엄마가 생기면 어떨지 물어보기도 했지만 설마 아빠가 이렇게 빨리 결혼까지 할 줄은 몰랐다.
김 집사까지 ‘사모님’이라고 부르니 결혼이야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너무 급하게 귀국해서 집에 음식 준비가 안 됐으니까 근처 식당에서 먹을까?”
‘누가 당신이랑 밥 먹고 싶대?’
반박하려던 순간, 강로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말이 막혔다.
“저기! 규진이 아직 경찰서에 있어요! 차 세워요!”
강로이는 다리를 ‘탁’ 치며 말했다.
‘다 이 여자 때문이야, 규진이를 잊어버렸잖아.’
하지만 운전사는 멈추지 않고 백미러로 임유나의 표정을 살폈다. 이제 자신들이 따라야 할 사람은 임유나라는 걸 본가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이건 강시후가 직접 당부한 내용이었다.
김 집사 또한 그들에게 귀띔했었다. 강씨 가문에서 오래 일하며 힘을 얻었다고 생각해 도련님과 아가씨 앞에선 물론이고, 새 사모님 앞에서까지 자신을 내세우려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월급을 주고 내보내겠다는 걸 말이다. 한 번의 예외도 없는 듯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본가 사람들은 새 사모님에게 무척 공손했다. 이곳의 대우가 너무 좋아서 모두 떠나기 싫어했다.
강로이는 운전사가 눈치를 보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들은 왜 이 여자 말을 그렇게 잘 듣는 거지?
“우리가 갔을 때 경찰이 이미 한규진의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으니까 굳이 한규진을 보석하지 않아도 돼.”
임유나는 간단히 설명했다.
강로이는 경찰서 안에서 한규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던 게 떠올랐다. 아마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던 것 같았다.
“아... 그렇구나.”
한규진의 어머니가 알고 있다면 강로이는 임유나가 한규진을 보석하든 안 하든 상관없었다.
임유나는 살짝 웃었다. 자신의 존재에 충격받아 한규진을 잠시 잊어버린 딸을 보니 한규진이 강로이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어리석은 사랑에 빠져있는 것 같지만 충분히 구제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한규진의 보석이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강로이는 더 이상 그 일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아까의 질문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아빠랑 진짜로 혼인신고까지 하신 거예요? 법적으로 부부가 된 거냐고요?”
임유나는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쓰겠다고 한 16억은 내가 시후에게 보내지 말라고 했어. 그리고 네 이모는 내가 본가에서 내보냈어. 앞으로 너의 용돈은 한도가 있을 거고 합당한 이유 없는 지출은 지원되지 않을 거야.”
강로이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
새엄마는 역시 악독했다. 친구들이 말했던 것보다 더 악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