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디데이 마지막 날, 차서아가 아래층에 내려올 때 윤건우와 이채린은 외출 준비가 한창이었다. 두 사람이 문밖을 나서려 할 때 그녀가 재빨리 윤건우를 불렀다.
“삼촌 바쁜 거 아는데 오늘은 꼭 집에 돌아와서 나랑 함께 밥 먹으면 안 될까요? 우리 둘이서만요.”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서요...’
미련과 일말의 기대를 품은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윤건우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얘가 설마 또 고백하려고 이러나?’
이제 막 거절하려고 할 때 이채린이 그의 손등을 톡톡 치면서 너그러운 척을 해댔다.
“나 오랜만에 친구들과 약속 있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건우 씨가 어른이잖아요. 애랑 사사건건 따지지 말아요, 네?”
마침내 그녀의 설득 하에 윤건우도 알겠다며 요구에 응했다.
원하는 답을 얻었지만 차서아는 여전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둘은 나란히 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차서아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방으로 돌아갔다.
사람은 죽은 뒤에 물건을 다 태워버려야 한다고 하는데 오늘은 이생에 남을 마지막 날이라 삼촌을 더는 귀찮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선뜻 제 물건을 정리해서 한꺼번에 불태우기로 했다.
차서아의 방에는 윤건우의 흔적들로 가득 찼다.
세면용품부터 시작해서 지금 입고 있는 옷까지 전부 윤건우가 마련해준 것이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이토록 섬세한 사람은 아니었다. 차서아의 일상생활은 대부분 가정부와 비서에게 믿고 맡겼는데 나중에 가정부가 차서아를 각박하게 굴었고 비서는 또 별장과 회사를 함께 돌보느라 소홀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느날 차서아가 감기에 걸려 고열이 났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날 마침 윤건우가 잠깐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고열에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차서아를 발견하지도 못했을 테고 의사 말대로 자칫 잘못될 수도 있었다.
그날 이후로 윤건우는 더 이상 차서아를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추억에서 빠져나와 다시 현실에 돌아온 차서아는 재가 된 본인 물품들을 바라보며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이 세상에 더는 그녀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방 청소도 깨끗이 마쳤지만 유독 그 옷장만은 테이프를 굳게 붙인 상태였다.
삼촌은 그녀의 시신을 발견하면 과연 어떤 반응일까? 엄청 슬퍼할까?
차서아라는 짐 덩어리가 사라지고, 더는 삼촌이 싫어하는 말을 나불거리는 아이가 없어질 테니 아마도 엄청 기뻐할 듯싶다.
집 청소까지 마친 후 차서아는 윤건우와 함께하는 최후의 만찬을 준비했다.
사실 그녀는 요리할 줄 모른다. 전에는 항상 윤건우가 그녀를 데리고 외식하거나 혹은 집에서 직접 요리해서 그녀에게 먹여줬다.
차서아도 요리를 배워서 삼촌에게 근사한 밥상을 차려주겠다고 했지만 어느 한번 뜨거운 기름에 덴 이후로 윤건우가 다시는 요리에 손도 못 대게 했다.
그럼에도 차서아는 몰래 요리를 배워서 그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하고 싶었다. 다만 미처 다 배우기도 전에 그날 사고를 당해서 망자가 된 것이다.
오늘은 다행히 기름에 델 일은 없다.
차서아는 무려 5시간 만에 풍성한 음식을 준비했다. 식탁 앞에 앉아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음식들이 식으면 덮이고 또 덮였지만 윤건우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않았다.
차서아는 또다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멍하니 휴대폰 화면만 쳐다보다가 문득 이채린이 SNS에 올린 피드를 하나 보았는데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사진은 두 장의 항공권이고 문구는 이러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원스에 가서 흰 눈이 보고 싶다고 할 때 망설임 없이 모든 걸 제쳐두고 함께 떠나줄 수 있는 것.]
그 순간 차서아는 사색이 되어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번 윤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통화가 바로 연결됐다.
“채린 언니랑 원스로 갔어요? 오늘 밤엔 나랑 함께...”
하지만 이때 불쑥 전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서아는 그제야 알아챘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이채린이었다.
“서아 너 설마 건우 씨가 진짜 너랑 함께 밥 먹을 줄 알았어? 꿈 깨!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얼른 짐 싸서 건우 씨네 집을 나오는 거야.”
말을 마친 후 차서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냉큼 전화를 꺼버렸다.
차서아는 뚜뚜 울리는 연결음만 들으면서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벽시계에서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릴 때 그녀는 식탁 위의 음식을 다 버리고 있었다. 이때 머리 꼭대기에서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서아 양, 7일 시간이 다 됐어요. 나랑 했던 거래가 후회됩니까?”
한기로 가득 찬 음침한 목소리가 별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 차서아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참담하게 대답했다.
“유감스럽긴 하지만 후회되진 않아요.”
그녀는 달력 앞으로 다가가 마지막 남은 한 장을 찢었다.
“이제 그만 떠날래요.”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차서아는 제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는 걸 바라봐야만 했다.
손을 앞으로 내밀자 투명한 영혼이 손톱부터 시작해서 손과 발, 나중엔 온몸을 잠식했다.
그녀는 끝내 이생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모습이 다 없어지기 직전, 차서아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삼촌, 안녕.”
‘이제 더는 못 볼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