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왜 이러느냐?”
동원이 손을 강헌의 눈앞에 흔들어대며 말했다.
“왕비 마마의 처소에 다녀오더니 혼이 나갔네.”
강헌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남궁진에게 말했다.
“전하, 마마께서 어찌 친절하시던지. 소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정원 밖까지 배웅해 주셨사옵니다. 전에 소인은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사옵니다.”
남궁진도 조경선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으나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강헌의 말을 들은 남궁진은 갑자기 불쾌감이 밀려왔다.
“뭐가 그리 친절하단 말이냐? 식칼 들고 우향을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하하하! 그야 그년의 자업자득이 아니겠습니까. 소인도 그 우 관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남궁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강헌을 흘끗 쏘아보자, 강헌은 곧바로 정색했다.
“아, 그리고 오늘 알게 된 건데, 마마께서 의술을 아시더군요. 먹는 약과 외용약을 써서 중독에 걸린 시녀를 치료하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랐사옵니다. 소인이 치료해도 그 정도는 못 했을 텐데.”
“뭐라?”
이전의 장면들이 남궁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여화공주가 자신을 모함했다며 조경선이 분석했을 때, 그리고 영이의 상처와 홍난의 중독을 치료했을 때를 떠올리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이 더 깊어졌다.
‘조경선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보기 싫었지만 이리 중요한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구나.’
“그리고 마마께서는 앞으로 소인에게서 의술을 배우겠다고 하셨습니다. 헤헤! 게다가 소인을 ‘스승님’이라 부르시더군요.”
남궁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고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다시는 사고를 치지 않도록 잘 감시하라.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조씨 가문이 무슨 음모를 꾸밀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씨 가문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어오른 남궁진은 불안해서 바로 동원에게 명을 내렸다.
“호위무사를 보내 왕비를 감시하라. 이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사가 교체되었다.
전에 외부의 한 술집의 주모였던 새 관사는 처세에 능했으나 어쩌다 보니 진왕부에 채용되었다.
진왕부의 규칙을 잘 알고 있던 새 관사는 부임 당일에 두 시녀를 대동하고 조경선에게 인사를 올렸다.
“소인 주영이라 하옵니다. 앞으로 우향을 대신해 부내 잡무를 맡겠으니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옵소서.”
“이 두 사람은 전하의 명으로 마마를 모실 시녀입니다. 연향아, 초연아, 마마께 문안드려라.”
두 사람이 공손하게 절을 했지만, 조경선은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았다.
‘이미 한 명의 시녀가 있는데 왜 갑자기 2명이나 더 붙이려 할까? 남궁진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구나.’
“전에는 어디서 뭘 하였느냐?”
초연이 답했다.
“쇤네는 원래 전 태부사경 한 대인의 댁에서 일했사온데 한씨 가문에 문제가 생겨 재산이 전부 몰수되는 바람에 쫓겨나게 되었사옵니다.”
그러자 조경선이 별생각 없이 물었다.
“한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겼는데?”
초연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그것은 쇤네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한씨 가문의 일은 경성의 귀족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한 대인 댁의 노비였던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옛 주인을 탓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인품이 괜찮아 보이는군.’
조경선이 고개를 돌려 연향을 쳐다보았다.
“너는?”
연향은 다소 긴장한 듯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쇤네는 일한 적이 없사옵니다. 비록 처음으로 몸을 파나 거두어만 주신다면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이 한 몸 마마께 바치겠나이다.”
“왜 갑자기 몸을 팔려고?”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치료비를 벌려고.”
조경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누가 아픈 아비를 돌보느냐? 형제자매는 있고? 있다면 몇 살이냐? 네 아비가 걸린 병과 증상이 어떠한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소상히 말하라.”
조경선이 이렇게 자세하게 물을 줄 몰라서 연향은 더욱 불안했다.
“아홉 살과 열 살 된 남동생이 있사옵니다. 아버지는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 탓에 말을 제대로 못 하십니다.”
그녀가 자꾸 자기 눈을 피하는 것을 보고 조경선은 뭔가 께름직한 느낌이 들었다.
‘이년의 말이 사실이라면 집안이 풍비박산 일보 직전인데.’
조경선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주영이 서둘러 물었다.
“마마, 두 사람을 거두시겠사옵니까?”
“초연은 거두겠으나 연향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연향의 어깨가 움찔했다.
조경선이 그것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연향의 집에 가자꾸나.”
연향의 집은 작고 낡았다.
한 칸밖에 없는 기와집에 온 가족이 살고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침상에는 과연 중풍 증상을 보이고 있던 한 노인이 얼굴이 일그러진 채 침을 질질 흘리며 누워 있었다.
‘뇌에 어혈이 쌓인 게 분명하군.’
“의원은 불렀느냐?”
연향이 아버지의 병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았단 것이 확인되자, 자신의 의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조경선은 마음을 조금 놓았다.
“전에 약을 지어 먹였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번엔 부르지 않았사옵니다. 이웃 노파의 말로는 아버지가 귀신에게 홀렸다면서 도사를 불러야 한다고 하더군요.”
조경선은 어이없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았다.
“해서 도사는 왔느냐?”
“아직입니다. 오 도사님께서 바쁘시니 아마 모레나 되어야 오실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귀신에 홀린 것이 아니라 병이니 어서 가서 도사께 드린 은자를 되찾아오너라. 그리 아니하면 다 잃고 말 것이다. 도사를 열 번 부른다 해도 소용없다.”
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노인의 맥을 짚고 입과 코까지 살펴본 후, 단호하게 말했다.
“고칠 수 있다.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한다면 네 아비는 이레 안에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조경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연향에게 처방이 적힌 헝겊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
“어서 가 약을 사 오너라. 난 침을 놓겠다.”
“쇤네가 어찌 마마께 신세를 질 수 있겠사옵니까.”
“목숨이 급하다. 아비를 구하고 싶지 않으냐?”
“구하고 싶사옵니다.”
조경선은 말하면서 영력으로 침통을 소환했다.
“그럼 잔말 말고 어서 가봐.”
연향이 약을 사러 간 후, 조경선이 노인의 옷을 벗기려는 것을 보더니 초연은 화들짝 놀랐다.
“마마, 어찌 사내의 옷을…”
“혈 자리 몇 개만 노출하려는 것뿐이야. 성별을 떠나 그저 환자다.”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상, 하체의 주요 혈 자리에 은침을 놓았다.
또한 몰래 영력으로 노인의 한기를 빼내며 초연에게 말했다.
“향을 피워 거의 다 탈 때면 알려다오. 침을 뽑아야 한다.”
이때, 약을 들고 돌아온 연향이 은침이 꽂혀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존귀하신 마마께서 천민들의 병까지 치료해 준다고?’
그녀는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약을 달였다.
침을 뽑을 때쯤, 연향의 아버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