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아내
두 사람은 나란히 한결 로펌에 들어섰다.
프런트 데스크에 임정규의 유언장을 담당한 변호사 오지훈이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남자는 눈에 총기가 넘쳤고 전문성과 예리함까지 겸비했다.
그를 발견한 임다인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오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태윤아?”
서태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모처럼 공손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저씨.”
이내 두 남녀를 번갈아 보다가 서태윤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우리 아내 유산 상속 문제 때문에 같이 왔어요.”
서태윤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당당하게 말했다.
오지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내?”
서태윤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임다인의 잘록한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으며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짧고 굵게 소개했다.
“임다인이 제 아내예요.”
오지훈은 확답이라도 받으려는 듯 임다인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네 결혼 상대가 태윤이라는 거야?”
임다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은 언제 했어?”
질문이 이어지자 서태윤이 입을 열었다.
“방금.”
오지훈은 피식 웃었다.
“그래, 들어가서 자세히 얘기하자.”
서태윤은 임다인을 감싸 안고 오지훈을 따라 조용한 회의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은 오지훈은 표정이 돌변하더니 프로다운 신중하고 진지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우선, 혼인신고 접수증을 제시해줘.”
곧이어 임다인과 서태윤이 각각 꺼내서 보여주었다.
오지훈은 확인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의례적인 절차라서 별다른 뜻은 없어.”
임다인이 대답했다.
“네, 이해해요.”
확인을 마치자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녀석! 정말 결혼했을 줄은 몰랐네. 안목이 좋구나.”
서태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
“네, 인연이 닿을 때 해야죠.”
옆에 앉아있던 임다인도 미소로 화답했다.
오지훈은 문제가 없음을 확신하고 나서 임정규가 생전에 남긴 유언장을 꺼냈다.
“이제 유산 상속 조건이 충족되었어. 네 할아버님께서 작성한 유언장에 따라 제인 그룹의 18% 지분을 정식으로 상속받게 될 거야. 그리고 서림동에 있는 청련 별장도 명의를 이전할 예정이야.”
그리고 낭독을 마친 다음 서류를 임다인에게 건네주었다.
“한 번 확인해 봐. 사인하는 순간 내용은 즉시 효력이 발생할 거야.”
눈앞의 서류를 내려다보는 임다인은 속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결국 한참을 침묵한 끝에 볼펜을 들어 이름을 서명했다.
사인을 마친 그녀를 보고 오지훈이 말을 이어갔다.
“네 할아버님께서 남기신 또 다른 유언장에 25살이 되어야 공개 가능하다는 조건이 있는데 아직 6개월 남았어. 하지만 요 며칠 큰아버지 내외께서 조바심이 나는 듯 갑자기 유언장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어.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안전에 유의해.”
이내 서태윤의 얼굴을 무심코 훑어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지금은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으니 너무 겁먹지 않아도 돼. 태윤이가 널 지켜줄 거야.”
임다인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태윤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얼굴은 표정 변화가 없었고 시종일관 진지하고 무심했다.
워낙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닌지라 속내를 들여다본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녀를 지켜준다는 게 과연 사실일까?
어쨌거나 지금은 상부상조하는 관계라서 보호 대상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유산 상속을 처리하고 나서 서태윤과 임다인은 한결 로펌을 떠났다.
밖에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었지만 임다인의 마음속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제인 그룹의 지분을 손에 넣었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우울했다.
서태윤이 곁눈질로 임다인을 살폈다. 과거에 그녀가 겪었던 일을 떠올리자 눈빛이 점차 누그러졌다.
“나한테 볼일이 또 있나?”
뜬금없는 질문에 임다인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네?”
정신이 딴 곳에 팔린 그녀를 보고도 서태윤은 짜증을 내기는커녕 차분하게 다시 물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냐고.”
임다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오늘 저녁 약속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있어요.”
“뭔데? 얘기해 봐.”
“그게... 오늘 저녁에 태윤 씨 이름을 팔아도 될까요?”
이내 그를 빤히 쳐다보며 조심스러운 말투로 넌지시 떠보았다.
서태윤은 아무 말 없이 그윽한 눈동자로 바라보기만 했고 상대방이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
임다인은 심호흡을 한 뒤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오늘 밤 진성 그룹 부대표 안범희가 협력 건을 핑계로 저를 에덴 클럽으로 불러냈는데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게 분명해요. 그래서 태윤 씨 명의를 빌려 안전을 확보하려고 해요.”
서태윤이라면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미 조사를 마쳤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고 정면승부를 택했다. 어쩌면 측은지심이 발동해 그녀를 불쌍히 여길지도 모른다는 것에 한 표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