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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각자의 목적

서태윤은 고개를 돌려 임다인을 힐긋 쳐다보았다. “어디로 가?” 임다인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한결 로펌이요.” 예상외의 장소에 서태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기사는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 나서 침묵이 흘렀다. 20분 뒤, 검은색 카이엔이 한결 로펌 입구에 유유히 멈추어 섰다. “다 왔어.” 매력적이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좁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그의 말에도 임다인은 창밖을 흘끗 쳐다만 볼 뿐 꿈쩍하지 않았다. “태윤 씨.” 이내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서태윤은 고개를 돌렸다. 임다인이 우물쭈물 손을 내밀더니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부탁했다. “저랑... 같이 가주시면 안 돼요?” 바짝 긴장한 목소리는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서태윤은 눈을 내리깔고 소매를 살포시 붙잡은 손을 바라본 후 임다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 속에 다정함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묵묵부답하는 그를 보자 임다인은 괜스레 불안했다. 결국 고민 끝에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사실 태윤 씨와 결혼한 목적이 따로 있었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태윤의 눈썹이 까딱하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큰아버지 몰래 유언을 남겼는데 바로 제인 그룹 주식의 18%를 상속해주겠다는 내용이었어요.” 비록 긴장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이실직고 하기로 했다. “하지만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결혼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었기에...” “그래서 나를 발판으로 삼은 건가?” 서태윤이 불쑥 끼어들면서 그녀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추궁하는 남자를 보자 임다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 하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지는 못하고 소매를 잡아당기던 손가락도 힘이 점점 빠졌다. 결국 한 마디로 종결했다. “죄송해요.” 서태윤이 어떤 사람인데, 이제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속으로 화가 났을 게 뻔했다. 하지만 승부를 걸어야만 했다. 만약 지금 고백하지 않으면 원하는 물건을 되찾을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안범희를 상대하려면 서태윤이라는 백이 필요했다. 아니면 오늘 밤은 도마 위의 생선이 될 테니까.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차라리 서태윤의 손에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서태윤은 임다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두려움과 공포심에 사로잡힌 눈에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를 두려워하는 건가? 대체 뭐가 무서운 거지? 서태윤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이유가 있어서 결혼한 거야.” 임다인은 어리둥절한 와중에 환청이라도 들은 듯싶었다. 그윽하고 무심한 눈동자 속에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자상함을 포착할 줄이야! 서태윤이 태연하게 시선을 피하더니 이실직고했다. “할머니의 독촉에 못 이겨 너랑 결혼하기로 했을 뿐, 입막음을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해.” 그의 대답에 임다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마음의 부담도 덜해졌다. 이내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의 목적이 있는 이상 딱히 걱정할 게 없었다. 하지만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 야무지게 다짐까지 했다. “이번에 도움을 받았으니까 추후 할머님을 뵙게 되면 최선을 다할게요.” 서태윤은 무심하게 대답하고 슈트를 정리하더니 그녀를 다그쳤다. “얼른 가지? 시간 없어.” 말을 마치고 나서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임다인은 자칫 시간을 지체해서 그가 짜증이라도 낼까 봐 서둘러 뒤를 따랐다. 앞에서 걸어가던 서태윤은 곁눈질로 등 뒤의 임다인을 몰래 살폈다. 하이힐을 신은 채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여자를 보자 걱정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순간 그녀의 다리가 갑자기 휘청거렸다. 서태윤이 잽싸게 손을 뻗어 허리를 감싸더니 튼튼한 팔로 단단히 지탱해주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웠고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임다인은 맨정신으로 서태윤과 이렇게 바짝 붙어 있은 적은 처음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콩닥콩닥. 그녀를 응시하던 서태윤도 목젖이 꿀렁거렸다. 주변에는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신이 번쩍 든 임다인이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왔고 쑥스러우면서도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서태윤의 손이 허공에 떠 있었고, 마치 찰나의 온기를 되새기려는 듯 늘씬한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임다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마음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지만 차마 눈은 마주치지 못했다. 서태윤은 묵묵히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다소 차갑고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조심해.” 임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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