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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인내심

“서태윤...” 이름을 듣는 순간 임다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네.” 배원우의 목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다. “대표님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이따가 태정 그룹에 잠깐 오시라고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서태윤이 할 말이 있다고 먼저 만나자고 하다니?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결혼을 승낙할 생각인 건가? 그녀는 서둘러 대답했다.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배원우가 말했다. “네, 그럼 도착하시면 이 번호로 연락주세요.” “알겠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꾸물거릴 틈도 없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후 헤어핀으로 고정하고 하늘색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한 폭의 수묵화처럼 고급스럽고 세련된 색상은 그녀의 피부를 더욱 화사하게 만들어주었고 여성스러운 매력을 극대화했다. 게다가 목을 가리는 디자인 덕분에 쇄골의 키스 마크를 감쪽같이 가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까지 정리한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계단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빌어먹을 년이 대체 언제까지 가식을 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계단을 내려오던 임다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여태껏 키워줬더니 안범희와 하룻밤 자는 것도 못 해요? 집안을 위해 뭐라도 해야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투에는 임다인에 대한 불만과 경멸이 가득했고, 목소리 또한 매정하기 그지없었다. 임성민은 못마땅한 얼굴로 힐끗 쳐다보더니 나지막이 경고했다. “조용히 해. 다인이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들으라고 하죠, 뭐. 내 말이 틀렸어요?” 윤화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안범희의 눈에 들었다는 자체로 복 받은 줄 알아야지, 설마 본인이 진짜 잘나가는 부잣집 아들의 짝이 될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 임성민이 묵묵부답했다. “흥!” 윤화진은 말을 내뱉는 족족 가시가 돋쳐 있었고 단어 선택도 점점 더 신랄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년이 무슨 고결한 성녀라고 되는 줄 알아요? 방금 목에서 키스 마크를 똑똑히 보았거든요? 어젯밤에 외간 남자랑 신명 나게 놀다 온 게 뻔해요.” 구석에 숨어 엿듣던 임다인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평소에 순수한 눈동자도 어느덧 증오로 뒤덮였다. 잠시 후, 그제야 마음을 추스르고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내 마치 아무렇지 않은 척 계단 모퉁이에서 걸어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큰아버지.” 임다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임성민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을 뿐, 싸늘한 표정에서 호의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안범희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야?”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임다인은 별다른 설명 없이 대충 얼버무렸다. “알아서 잘 처리할게요.” 임성민이 입을 꾹 다물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명령조로 말했다. “딱 이틀 줄게. 무슨 수를 쓰든 그전까지 신사동 개발 건설 사업에 대한 협력 의향서를 제출하도록 해.” 임다인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말을 마치고 나서 한마디 보탰다. “대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도 약속을 꼭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임성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프로젝트만 따낸다면 너한테 주기로 한 물건은 당연히 돌려줄 거야.”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임다인은 묵묵히 뒤돌아서 떠나려고 했다. “잠깐!” 이때, 윤화진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집에 오자마자 또 어딜 가는 거야?” 임다인은 짜증을 내는 대신 시종일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요.” 윤화진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밖에서 처신 잘해. 행여나 싸돌아다니다가 사고나 당하지 말고.” 이 말을 듣자 임다인은 속으로 조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말뜻을 어찌 모르겠는가? 즉, 죽더라도 25살 생일까지는 버텨야 했고 그들이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고 나면 알 바 아니라는 것이었다. 임다인은 고개를 돌려 윤화진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살짝 지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어떻게든 살아남아 볼게요.” 속으로는 적어도 그들보다 더 잘 살 것이라 다짐했다. 40분 후, 태정 그룹에 도착한 임다인은 휴대폰 통화 기록에 있는 첫 번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층 로비에 배원우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게이트 입구 옆에 잠자코 서서 기다렸다. 배원우는 게이트를 지나 느긋하게 걸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중하게 말했다. “다인 씨.” 임다인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배원우가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안녕하세요, 태정 그룹 배원우 실장입니다.” 임다인은 활짝 웃더니 인사를 건넸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배원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대표님께서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임다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일관 예의를 갖추었다. “감사합니다.” 이를 본 주변 사람들이 몰래 숙덕거리기 바빴다. “저 여자는 누구지? 실장님께서 친히 모시러 오시다니?” “설마 실장님 여자친구?” “아닐 거야. 예의 차리는 모습만 봐도 연인과 거리가 멀어 보이잖아.” “혹시... 대표님과 관련이 있는 분일까?” “한동안 대표님께서 구혜림이랑 만난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어?” “그러니까. 둘이 소꿉친구인데 서로 좋아 죽지 못해 안달이라고 했거든. 나중에 구혜림이 연기 경력을 쌓으려고 출국하는 바람에 헤어졌다고 했어.” “그러고 보니 방금 봤던 여자가 구혜림을 좀 닮은 것 같아.” “쯧쯧, 설마 대표님도 대타를 찾으려는 심산인가?” “알 바야? 부자들의 세계는 우리 같은 일개 직원이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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