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동병상련
태정 그룹.
똑똑.
“들어와.”
배원우는 허락받고 나서 서태윤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내 책상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정리된 파일을 올려놓았다.
“대표님께서 조사하라고 하신 여자에 대한 정보입니다.”
서태윤은 고개를 들어 서류에 시선을 돌리더니 늘씬한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름은 임다인이고, 임씨 가문 차녀예요.”
그러고 나서 대뜸 화제를 바꾸었다.
“공교롭게도 임다인 씨 부모님도 19년 전 비 오는 밤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다만 경운시에서 남해시로 향하는 길에 참변을 당했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봉인된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태윤은 온몸으로 싸늘한 기운을 내뿜었고 실내의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싶었다.
19년 전, 비 내리는 그날은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부모님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그는 겨우 10살에 불과했다.
임다인도 같은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곧이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고 맞아? 고의가 아니라?”
배원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단정 지을 수 없어요. 하도 오래전 일이라 조사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제대로 조사해. 이참에 우리 부모님 사건도 같이 알아봐.”
“네.”
그러고 나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비보를 접한 임정규 회장님은 충격으로 앓아누우셨고 결국 손녀가 8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어요. 그 이후로 임다인 씨는 큰아버지 임성민과 큰어머니 윤화진의 손에서 자랐는데, 임씨 가문과 제인 그룹도 임성민이 대신 관리해주고 있어요. 임정규가 생전에 남긴 유언에 따르면 임다인 씨는 만 25세가 되어야 유산을 정식으로 상속받을 자격이 주어지기에 임성민은 아직 진정한 후계자는 아니라고 해도 무방하죠.”
서태윤은 묵묵히 들으면서 손에 든 묵직한 파일을 넘겼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그랜드 호텔은 왜 갔대?”
배원우는 조사 결과에 근거하여 신속하게 대답했다.
“제인 그룹이 진성 그룹에서 진행하는 신사동 프로젝트를 눈독 들이고 있는데 임성민이 담당자가 안범희라는 정보를 캐내고 임다인 씨를 보낸 겁니다. 안범희는 업계에서 여자를 밝히기로 소문났거든요. 그래서...”
서태윤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다시 말해서 어젯밤에 약을 먹이고 그녀의 순결을 노렸다는 뜻인가?
이때, 아름다운 여체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 호텔에서 보여준 매혹적인 모습에 넘어가 이성을 잃고 끝도 없이 탐했다.
게다가 오늘 아침 애써 겁을 먹지 않은 척 연기하는 여자를 떠올리자 그동안 메말라 있던 감정이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결혼도 딱히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서태윤의 그윽한 눈동자는 당최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이내 손에 든 자료를 내려놓고 배원우에게 말했다.
“임다인에게 연락해서 할 말이 있다고 찾아오라고 해.”
배원우가 즉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임다인은 진성 그룹을 떠난 후 택시를 타고 임씨 저택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면 샤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윤화진을 맞닥뜨렸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그녀는 품에 애지중지 아끼는 래그돌을 안고 털을 빗겨주었다.
고양이를 발견하는 순간 임다인은 공포가 엄습해왔다.
결국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임다인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큰어머니.”
그녀가 돌아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윤화진은 안중에도 없는 듯 못마땅한 얼굴로 비난을 퍼부었다.
“무슨 낯짝으로 집어 온 거니? 부대표님한테 사과하러 갔어? 용서는 받은 거야?”
말투는 유난히 까칠했다.
임다인은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부대표님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제인 그룹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당연하지.”
윤화진은 콧방귀를 뀌었고, 목소리에 불신과 협박이 담겨 있었다.
“만약 이번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한다면 집에서 쫓겨날 줄 알아. 그리고 부모님 유품도 돌려받을 생각하지 말고.”
임다인은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았다.
이성적으로 지금은 의견 충돌보다 인내심을 발휘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괜히 화를 냈다가 큰일을 망치면 본인만 손해였다.
어찌 됐든 부모님의 유품을 받아내야 하는 입장이라 아직 안면박대하기에는 일렀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계속 협박당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임다인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뒤돌아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방에 가서 욕실로 직행했고, 욕조에 몸을 담근 다음 따뜻한 물로 샤워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화장대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내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낯선 번호였다.
임다인은 잠깐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임다인 씨, 안녕하세요. 저는 서태윤 대표님의 비서인 배원우라고 합니다.”
휴대폰 너머로 자기소개하는 남자는 말투가 상냥했을뿐더러 태도마저 정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