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립서비스가 아니야
그러고 나서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서태윤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주머니에서 정교한 벨벳 상자를 주섬주섬 꺼내 임다인에게 건네주었다.
뜬금없는 남자의 행동에 임다인은 어안이 벙벙한 채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뭔데요?”
“직접 확인해 봐.”
임다인은 상자를 건네받아 의혹이 가득한 표정으로 뚜껑을 열었다.
이내 물방울 모양의 커피색 다이아몬드 반지가 나타났고 눈부시게 빛났다.
커피색 다이아몬드는 독특한 빛깔로 소장용이 대부분이다.
5.2캐럿에 달하는 이 반지는 지난달 보석 경매에서 무려 56억이라는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
그런데 몇십억이 넘는 물건을 그냥 선물하다니?
손에 든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려다보는 임다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기분이 착잡했다.
서태윤이 갑자기 선물한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라니?
여자에게 반지를 선물하는 게 정녕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명목상 부부일 뿐이었다.
임다인은 상자 뚜껑을 닫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로 내밀었다.
“이렇게 비싼 건 받을 수 없어요.”
서태윤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거친 손길로 상자를 다시 쥐여주었다.
“비록 명목상 부부에 불과하지만 서태윤의 아내라는 사람이 행색이 너무 초라하면 되겠어?”
물론 납득이 가는 이유이지만...
여전히 망설이는 그녀를 보자 서태윤은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결국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너한테 줬으니 마음에 안 들면 버리든지 해.”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정교한 상자를 내려다보는 임다인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성격이 조금 쌀쌀맞긴 하지만 소문만큼 무서운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임다인은 더는 사양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무미건조했지만 말투가 한결 누그러졌다.
“집으로 가?”
“네.”
한 시간 후, 차는 임씨 저택 앞에 유유히 멈추어 섰다.
“도착했어.”
임다인은 고개를 돌려 다정한 눈빛으로 서태윤을 바라보더니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태윤 씨, 오늘 고마웠어요.”
서태윤이 천천히 눈을 뜨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감사 인사는 지겹도록 들었으니까 다음부터는 행동으로 옮겨.”
“행동이요?”
임다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서태윤이 손을 뻗어 턱을 살짝 움켜쥐더니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임다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공기 중에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줍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자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서태윤은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단지 립서비스가 아니야.”
매력적인 모습과 섹시한 목소리는 임다인의 취향을 완벽히 저격했다.
결국 충동적으로 몸을 숙여 남자의 입술에 살포시 키스했다.
서태윤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더니 온몸이 얼어붙었다.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한편, 익숙한 꽃향기가 콧속을 파고들자 어젯밤 호텔에서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로 인해 또다시 이성의 끈을 놓기 직전까지 갔다.
찰나의 입맞춤을 끝으로 임다인은 천천히 물러나며 쑥스러운 듯 물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나요?”
서태윤의 목젖이 꿀렁거렸고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곧이어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턱을 놓아주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그럭저럭.”
간결한 한 마디에 오만가지 감정과 복잡한 심경이 내포되었다.
이성을 되찾고 나니 임다인은 쑥스러운 나머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잘 자요. 안녕히 가세요.”
그러고 나서 마치 겁에 질린 사슴처럼 황급히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허둥지둥 뛰어갔다.
서태윤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가녀린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떼지 않았다.
방금 했던 입맞춤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 손을 들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이때, 운전기사가 공손하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서태윤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다시 싸늘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에덴 클럽.”
집에 들어서자마자 임다인은 계단에 서 있는 사촌 언니 임마리를 마주쳤다.
누가 봐도 트집을 잡으려고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온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닌 탓에 기력이 떨어져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시하려고 했지만 임마리는 작정이라도 한 듯 계단 입구를 막아서며 다짜고짜 뺨을 때렸다.
우렁찬 소리가 텅 빈 거실에 울려 퍼졌다.
임마리가 고래고래 외쳤다.
“왜? 이제 돈 많은 남자를 만나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다고 집안 예절과 규칙도 안중에 없는 거야?”
임다인은 이를 악물고 한쪽 볼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참으며 고분고분 인사를 건넸다.
“언니.”
그런데도 만족스럽지 않은 듯 임마리는 다시 팔을 번쩍 들더니 다른 한쪽 볼을 찰싹 때렸다.
임다인은 양손을 늘어뜨린 채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고 묵묵히 참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