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점심에는 병원에 어머니 보러 가야 하고 오후에는 아르바이트가 있고 저녁엔 실험 수업이 있어서 우선 물어봐야 했다.
조영훈은 그녀의 계산적인 모습이 일정을 묻는 박성준과 묘하게 닮아 있는 것을 느꼈다.
“대표님과 함께 대표님의 할아버지인 박현석 어르신을 만나러 가야 하고 벨리 가든으로 거처를 옮겨 대표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함께 산다니, 안시연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결혼하면 함께 사는 게 맞고 아이까지 임신했는데 설마 그 남자가 여전히 짐승처럼 굴까.
게다가 그녀는 매일 수업과 아르바이트, 어머니 병간호로 바빴기에 돌아가서 잠만 자면 되니까 마주칠 일도 없어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차 갖고 오셨어요? 지금 짐 실을게요.”
조영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요.”
‘너무 성급하게 구는데.’
안시연은 조영훈이 오해했다는 것을 알고 설명했다.
“점심에는 엄마 보러 병원에 가야 하고 오후에는 아르바이트가 있고 저녁에는 수업이 있어서 지금밖에 이사할 시간이 없어요.”
“알겠습니다.”
무심코 말을 뱉은 조영훈은 뒤늦게 눈앞에 있는 상대가 자기 상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시연은 짐이 많지 않아 여행 가방 하나면 충분했다.
조영훈은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점을 고려해 선뜻 짐을 들어주었다.
할머니가 집에 없어 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돈을 더 드렸다. 가지런히 돈과 열쇠를 함께 할머니가 열쇠를 숨기는 구멍에 넣어두었다.
어느 날 시간이 되면 다시 돌아와서 할머니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차 안에서 안시연의 손이 배에 닿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아가야, 가지 마. 난 네 엄마야. 넌 앞으로 내 아이고. 전에 했던 말은 듣지 마. 엄마는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구청에는 혼인 신고하려는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영훈은 안시연을 데리고 곧장 청장실로 들어가 안에 있는 사람에게 몇 가지 설명을 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청장은 미소를 지으며 안시연이 인적 사항을 작성할 수 있도록 서류를 건넸고 11시 정각에 조영훈이 한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안시연은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흐트러진 모습과 달리 오늘은 번듯하게 정장까지 차려입고 귀티를 내뿜고 있었다.
그 남자가 등장하자마자 청장과 다른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가지런히 앞에 포개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그 모습을 본 안시연은 웨이트리스 시절 손님을 맞이하던 자기 모습을 떠올렸다.
손님이 갑이다. 청장마저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이 남자의 사회적 지위가 대단한 것 같았다.
남자의 이목구비는 뚜렷했으며 눈썹 뼈가 두드러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은 차갑고 위엄 있는 인상을 주었다.
안시연은 그의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숨이 막혀 무의식적으로 눈을 내리깔고 바닥의 타일 틈새를 보았다.
청장이 사진을 찍자고 해서 안시연은 그 남자 옆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청장이 한 곳을 가리키며 손도장을 찍으라고 해서 인주를 눌러 손도장을 찍었다.
청장의 집무실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강력한 아우라를 가진 남자가 옆에 앉자 안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엄지손가락에 있는 물집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혼인 관계 증명서가 눈앞에 나타나자 그녀는 한장을 가져가 보지도 않고 에코백에 집어넣었다.
그녀에게 이건 결혼이 아니라 어머니의 생사에 대한 담보였기에 반드시 잘 간직해야 한다.
옆에 있던 의자가 바닥과 마찰하며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남자가 일어나자 안시연도 바로 따라 일어났다.
남자의 보폭이 무척 커서 그녀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남자를 따라잡기 위해 잔달음으로 달려야 했다.
남자는 이미 차에 올라탔고 조영훈은 문을 열고 그녀가 타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차에 탈 생각이 없는 듯 문 앞에 서 있었다.
“대표님, 저는 지금 병원에 있는 엄마 곁을 지켜야 해서 이따 벨리 가든에서 어르신을 만나 뵐게요. 짐은 조 비서님이 가져다줄 거예요.”
“지금 나랑 가.”
남자는 거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강압적인 어투였다.
안시연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소리 없는 반항을 하고 있었다.
조영훈이 그녀에게 빨리 타라며 눈짓했고 그렇게 몇 초간 교착 상태가 이어지더니 남자의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
“계약서에 사인했지. 난 협박하는 거 싫어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녀의 약점을 건드리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며 차에 앉았다.
그녀는 고집스럽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르바이트는 다 그만두고 아이만 건강하게 키워. 어머니 병원비도 내가 내. 조 비서가 이미 VIP 병실로 옮겨드렸어.”
“네.”
안시연은 그 남자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임신했으니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얌전히 아이를 지켜야 한다.
비록 그 남자가 위압적이고 말투에도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느껴졌지만 바로 엄마의 병실을 바꾼 것을 보면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상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롤스로이스 팬텀이 도로 양옆으로 높은 빌딩이 즐비한 번화한 동네를 달리는 동안 차 안은 더 이상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박성준은 그녀의 움직임 하나까지 전부 살폈다. 누구의 사람이든 곁에 두는 게 제일 안전했다.
차가 멈추자 안시연은 문 두 개가 천천히 열리는 것을 보았다.
여긴 그녀가 대리운전할 때 갔던 곳이 아니다.
안시연은 조영훈이 도우미에게 여행 가방을 건네며 지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수선정에 둬요.”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는 이미 10미터 정도 걸어 나간 뒤였다.
안시연은 그제야 다리가 길어도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처럼 키 작은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보폭이 아닌가.
그녀도 작지 않은 키였지만 남자만큼 다리가 길지 않을 뿐이었다.
정원과 한옥으로 이루어진 저택은 곳곳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푸른 나무와 하얀 옥돌, 정원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연못에는 흰색, 붉은색 물고기가 뒤섞였는데 통통하니 무척 예뻤다.
안시연은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멈추는 순간 저 남자가 문을 넘어 사라질 것 같았다.
남자가 성큼성큼 송도원으로 들어가자 안시연도 서둘러 따라갔다.
우아한 거실은 사방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가운데 한 노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남자의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안시연은 그의 뒤에 가만히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쳇.”
박현석은 박성준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난 네가 계속 사무실에서 살 줄 알았다.”
박성준이 곧장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자신을 가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안시연은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 당황한 그녀는 바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적막한 공기에 요란한 심장 소리만 들렸다.
“누구?”
박현석은 조심스러운 상대의 모습에 인자하게 말했다.
“아가씨, 서 있지 말고 이리 앉아.”
단발머리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를 보니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미성년자처럼 보였다.
안시연은 입술을 달싹이며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던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박현석의 눈에는 두려움으로 보였다.
“여기선 내 말만 들으면 돼.”
박현석이 박성준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씨, 겁내지 말고 여기 앉아요.”
그제야 안시연은 걸음을 옮겨 소파 가장자리에서 3분의 1 정도 떨어진 곳에 앉더니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님, 안녕하세요.”
“이 자식, 말을 해.”
사나운 어투가 안시연에게 보여줬던 다정한 온화함과는 사뭇 달랐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원하는 손자며느리와 증손자까지 다 데려왔어요.”
박성준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인 듯 말하자 박현석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안시연을 바라보더니 이내 박성준의 다리를 찰싹 때렸다.
“아직 어린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