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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안시연은 박현석이 남자를 때리는 모습에 서둘러 입을 열어 설명했다. “할아버님, 전 22살 성인이에요.” 영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박현석은 그 말을 믿었다. 인형 같은 소녀는 영리하고 순수하며 깨끗해 보여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했다. “저 여자가 내 아이를 임신했어요. 할아버지가 손자며느리와 손자를 그렇게 원하시니 오늘 혼인신고도 했어요.” 박성준은 말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혼인관계 증명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망할 놈, 결혼을 이렇게 대충 하는 게 어디 있어!” 박현석이 언성을 높이자 가뜩이나 긴장한 안시연은 심장이 철렁하며 겁에 질려 무의식적으로 손가락 각질을 뜯었다. 박성준은 이미 익숙했다. 목청 좋은 걸 보니 할아버지가 아직 정정한 것 같다. “할아버지께서 찾아준 맞선 상대들은 목적이 분명해서 싫어요. 맞선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애도 임신했으니까 제가 책임져야죠.” 박현석은 자신이 손수 키운 손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맞선에 시간을 낭비하는 게 싫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아이를 낳았으니 책임지겠다는 건 모를 일이다. 그의 손자는 가정을 꾸리는 것에 생각이 없었다. 결혼은 그에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며 혼자 살면서 일하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데려온 아가씨는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손자며느리였지만 대체 애는 어쩌다 생긴 걸까. 손자 나이 28, 혈기 왕성한 나이라 생리적 욕구가 있는 게 당연했다. 박현석은 무척 기뻤다. “결혼했으면 잘 살아. 감정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생길 테니까 가정도 꾸렸으니 너무 일에만 목매지 마. 일은 어차피 해도 해도 끝이 없어.” “네, 할아버지.” 박성준은 실랑이를 벌여도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았기에 차라리 할아버지 기분이라도 좋게 순순히 응했다. “아가씨는 이름이 뭐지?” “안시연입니다.” “시연이, 이름도 예쁘네.” 박현석은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집엔 또 누가 계셔?” 안시연은 재빨리 맞은편 남자를 흘겨보았고 그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간섭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엄마가 계세요.” “벨리 가든은 넓으니까 여기 식사나 생활에 익숙하지 않으면 엄마 모시고 와도 돼.”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를 생각하며 코끝이 시큰거려 이를 악물었다. “할아버님, 감사해요.” 박성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모든 표정을 지켜보며 관찰했다. 점심을 먹고 안시연은 박성준을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다. 남자는 여전히 긴 다리와 보폭으로 앞서 걷고 배가 부른 안시연은 빨리 걸으면 배가 아파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문을 지나 수선정으로 들어서자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건물은 고즈넉하고 한가롭게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것처럼 보였다. 건물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개울을 건너 작은 건물 맞은편 정원으로 연결되는 아치형 다리가 놓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도련님.” 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다들 기다리고 있다가 박성준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서둘러 몸을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시연, 여기 사모님입니다.” 남자가 옆에 있는 상대를 가리키며 소개하자 모두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시선을 돌려서야 문 앞에 나타난 안시연이 보였다.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자 안시연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해 남자와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안시연은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힘겹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박성준이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 여기선 전부 이 여자 말에 따르세요. 이 여자보다 한발 먼저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고 사고가 일어나는 걸 피해야 할 겁니다.” “네.” 박성준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 사람이 한 명씩 나와서 자기소개를 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는 임산부 영양 건강 관리사 장지현입니다. 사모님의 식단, 정신 건강, 산부인과 검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는 임산부 요가 강사 메리입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는 경호원이자 운전기사 성이진입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는 수선정 집사 최미숙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안시연은 전부 여성인 네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정하고 온화한 얼굴의 최미숙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임시로 채용됐는지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앞으로 일상적인 일은 이 사람들이 다 할 테니까 불만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알았어요.” 안시연은 벌써 불만이 생겼다. “이 사람들 없이 저 혼자 살 수는 없나요?” “안 돼.” 안시연은 박성준이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 몰랐기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수락했다. 남자가 건강한 아이를 원한다고 했으니 그녀의 기분보다 아이가 더 중요했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엄마 보러 가도 돼요?” 박성준의 휴대폰이 진동하자 그는 휴대폰을 흘끗 쳐다보며 받지 않았다. “그래. 성 기사가 데려다줄 거야. 수선정에 있을 때 말고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안시연은 남자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타협하듯 짧게 대답했다. 남자는 그녀를 남겨둔 채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안시연은 네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들은 사무적인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사모님, 수선정 구경시켜 드릴게요.” 최미숙이 제안했다. “아니요. 그냥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곳이 어딘지만 알려주세요.” 최미숙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사모님, 기본 생활이 뭔데요?” “먹고 싸고 자는 곳이요.” 이 말을 들은 최미숙은 경박한 게 아니라 오히려 재밌다고 느꼈다. “평소 도련님은 집에서 잘 식사하지 않고 사모님 음식은 영양사가 식단을 짜고 제가 만들 거예요. 다른 건 2층 방에서 할 수 있는데 2층에는 서재와 침실이 있어요.” 침실 하나? 보아하니 그녀 혼자 살면서 그 남자와 마주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너무 좋았다. “네, 알겠어요. 오늘 저녁은 준비할 필요 없어요. 병원에서 바로 학교 실험 수업 들으러 가야 해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점은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엄마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미숙이 난감한 듯 말했다. “우선 도련님께 말씀드리고 저녁을 준비할지 말지 결정해야 해요.” 안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저녁 식사도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네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모두 안시연의 말을 기다렸다. “하세요. 돌아와서 먹을게요.” 규칙은 남자가 만든 것이니 여기서 대치해 봐야 결국 남자의 동의를 거쳐야만 했다.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최미숙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이진 씨, 가요.” 성이진이 운전하고 안시연은 뒷좌석에 앉아 불안한 마음에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따가 엄마한테 VIP 병실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지?’ 훌륭하고 강직한 엄마가 2억으로 다른 사람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걸 알면 화를 내지는 않을까. 이제 그녀는 임신했지만 아이를 지울 수 없고 아직 학생인데 벌써 결혼한 걸 알면 엄마가 실망하지는 않을까. 성이진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다가 병동 입구에 다다르자 눈치껏 걸음을 멈췄다. 안시연은 문 앞에 서서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후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엄마.”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안가인은 모든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부드러운 눈매와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얼굴로 안시연을 맞이했다. “우리 딸.” 안시연은 침대 곁으로 다가가 아무 말 없이 곧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엄마, 실망시켜서 죄송해요.” 엄마에겐 원칙을 어긴 문제였기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다. 안가인은 안시연에게 단 한 번도 거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딸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존심도 세세 굳이 채찍이 필요 없었다. 게다가 복수가 차면서 배의 크기가 두 배나 더 커져 몸을 일으켜 세우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우리 딸, 엄마는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응원할 거야.” 일어날 수 없었던 안가인은 둘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다. “넌 말 잘 듣고 이해심 많은 아이니까 엄마는 네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라고 생각해.” “아니에요.” 안시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목이 메었다. “엄마, 나 정말... 너무 많은 잘못을 했어요.” “우리 딸, 우선 침대에 올라와서 말해. 엄마 이대로 버티기 힘드네.” 안시연이 그 말에 고개를 들자 두 팔로만 몸을 지탱하고 있는 엄마의 하얀 눈이 노랗게 물든 것을 보았다. 의대생인 그녀는 엄마의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시연은 서둘러 일어나 엄마가 눕는 것을 도왔다. “우리 딸, 엄마는 알아. 네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리 없다는걸.” 안시연은 주연희가 전희진을 때리듯 차라리 엄마도 자신을 때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매를 들기엔 너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엄마.” 안시연이 솔직하게 말했다. “저 임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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