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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러라고 해.” 상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무심한 듯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영훈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가 장풍 그룹의 대표인 걸 생각하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대표님, 그 여자가 대표님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키보드를 두드리던 긴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말해봐.” “어르신께서 결혼을 재촉하셔서 맞선 스케줄이 두 달 뒤까지 잡혀있습니다. 이젠 상대도 생겼고 아이도 있으니 이보다 더 효율적인 해결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신성한 결혼이 그들에겐 협업하는 프로젝트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안시연 씨는 어머니와 둘이 살아 집안 배경이 단순합니다. 어머니는 현재 간 센터에서 지내며 돈이 많이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영훈의 말뜻은 분명했다. 돈으로 여자를 데려오는 것 외에 그의 아이까지 이미 생겼다. 게다가 상대 여자는 굳이 노력과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이 돈으로만 해결이 가능한데 박씨 가문에 차고 넘치는 게 돈이 아닌가. 그러면 박현석도 그에게 잔소리하지 않고 그도 맞선을 보며 시간 낭비하지 않고도 박현석의 기분을 달랠 수 있었다. 상대의 목적은 분명했다. 충분한 돈만 주면 성가시게 굴지 않고 얌전히 말을 들을 거다. 하나는 돈을, 하나는 일상의 평온함을 원하니 각자 용건만 취하면 그만이었다. 복잡한 관계를 맺은 재벌가 아가씨와 결혼하는 것보다 더 깨끗하고 효율적이 아닌가. 어차피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거라면 안시연이 제격이었다. “머리는 똑똑해?” “금성 지역 수능 이과 수석에 딱 8점 깎였답니다.” “스케줄은?” 환한 표정을 짓는 조영훈은 이미 상사의 일정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내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시간 있습니다.” 박성준의 시선이 마침내 조영훈에게 향했다. “내일 알아서 혼인신고 해.” “네, 대표님.” 조영훈은 사무실을 나와 곧바로 상사의 혼인신고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안시연은 아르바이트와 어머니 간병 때문에 기숙사가 문을 닫기 전에 돌아갈 수 없어 학교 후문 근처 농가 주택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았다. 집주인은 혼자 사는 할머니였는데 집세도 싸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는 데다가 통금시간도 없었다. 어젯밤 아르바이트 두 탕을 끝낸 시간은 이미 새벽 4시였고 그녀는 4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안시연은 양치하고 세수한 뒤 텀블러와 책을 챙겨 학교로 향했다. 학교 편의점에서 가장 저렴한 야채빵 두 개로 아침을 때운 그녀는 수석으로 국내 최고 의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굳이 석사, 박사에 따로 응할 필요 없이 8년제 임상의학과에 합격한 동기들의 수준은 다 비슷했다. 전공책 저자가 단상에서 강의하고 있었고 안시연은 집중해서 수업을 들었다. 장학금을 받아야 했기에 당연히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시간을 아껴 지식을 흡수해야 했다. 그래서 외투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해도 옷이 두껍고 수업에 집중한 탓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쉬는 시간에 알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고 나서야 부재중 전화 세 통을 확인했다. 안시연은 간 센터 의사의 연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교실을 나와 조용한 곳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시연입니다.” “안시연 씨, 우리 대표님이 그쪽이랑 결혼하고 싶다니까 준비하세요.” “바빠요.” 안시연은 새로운 유형의 사기 전화라고 생각해 매정하게 끊어버렸다. 바빠요? 조영훈은 끊긴 통화를 몇 초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건가?’ 그렇다면 직접 학교로 찾아갈 수밖에. 기성의대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각 전공의 수업 시간표와 해당 강의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루 24시간을 48시간으로 나누어도 모자란 안시연이 보이스 피싱에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뒤돌아 금방 통화 내용을 잊어버리고 쉬는 시간을 이용해 교수님이 강의한 내용을 복습했다. 수업 종이 울리자마자 안시연은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 뒷문을 통해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안시연 양.” 건물 아래에서 누군가 안시연을 불렀다. 흔히 보이는 양복을 입고 있지만 상대는 보험을 파는 사람과는 사뭇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죠?”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 하려고 데리러 왔어요.” 안시연은 아까 전화가 떠올라 멈칫했다. “그쪽 대표님하고요?” “네, 그쪽 배 속에 있는 생물학적 아버지죠.” 점점 더 많은 학생이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던 조영훈은 불필요한 소란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제안했다. “장소를 옮겨서 얘기를 나누죠. 조건은 얼마든지 제시하세요.” “알았어요.” 안시연은 1초라도 망설이는 것조차 상대에 대한 실례인 것 같았다. 2억을 쉽게 내주고 그녀도 어제 막 임신한 걸 알았는데 오늘 바로 찾아온 걸 봐서는 대단한 사람이 분명했다. 상대가 기꺼이 책임진다면 그녀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 분명 어제 스스로를 설득해 수술까지 잡았지만 어젯밤 꿈속에서 아기가 동그란 얼굴과 큰 눈으로 손가락을 빨며 앳된 목소리로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속의 꺼림칙함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핏줄을 끊어낸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일련의 협상 끝에 학교 근처 작은 호수에서 안시연은 남자 측 대리인 조영훈과 혼전 합의를 달성했다. “안시연 씨, 계약서를 이미 작성했으니 확인하시고 별다른 의견 없으시면 사인하세요.” 조영훈이 계약서와 펜을 내밀자 건네받은 안시연이 웃었다. “이미 준비하셨네요?” “서로 윈윈이죠.” “윈윈, 마음에 드네요.” 엄마도 병을 이겨냈으면 좋겠는데. 아르바이트하며 손해도 많이 봤던 터라 안시연은 계약서 항목을 꼼꼼히 살펴봤다. 내용은 아주 명확했다. 그녀는 박씨 가문을 위해 아이를 낳고 아내와 엄마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혼인에 변경 사항이 생길 경우 위자료를 제외하고는 남자 측 재산은 분할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는 어머니 안가인 씨를 위해 치료비를 제공하고 적절한 간 기증자를 찾아준다. 안시연은 그날 밤 남자의 냉담함과 그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모습을 떠올리며 정정했다. “간은 합법적인 방식으로 취득해야 해요.” “물론이죠.” 안시연이 곧장 서명했다. “사인했어요.” 계약서를 건네주면서 그녀는 만감이 교차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현재 상황에서는 결혼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주 짧게 얘기를 나눴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본 조영훈은 안시연이 매우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너무 곱게 자란 탓에 세속적인 대처에 능하지 않고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아직 속세에 물들지 않았지만 연약해서 남에게 약점을 잡히고 이용당하기 쉬웠다. 순수하고 예쁘장한 얼굴에 깨끗한 마음마저 지녔는데 대단한 남자가 아니라면 그녀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았다. 조영훈은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계산했다. “제가 이미 다 준비했으니까 본인 서류만 가지고 저랑 같이 구청으로 가요. 대표님만 오시면 바로 혼인신고 할 수 있으니까 10분 안에 끝나요.” “혼인신고를 한 뒤엔 더 할 일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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