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김소연은 한울 그룹의 아래층에서 건물을 올려다봤다.
한울 주얼리는 외할아버지가 물려준 지분이었고, 김소연은 20살 되던 해에 인수받아 3년 안에 눈에 띈 발전을 가져왔다. 그녀는 허정우를 전적으로 지지하여 대표 자리에 앉힌 후 대표 이사로 물러나 묵묵히 그를 도왔다. 늘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꿨지만 불과 열흘 만에 모든 게 달라졌다.
김소연은 주먹을 불끈 쥐고 곧바로 맨 위층의 주주총회실로 향했다.
문이 닫히지 않은 탓에 김소연은 회의실 테이블에서 서로 뒤엉킨 채 애정행각을 나누는 남녀를 보게 되었다.
김은지는 테이블에 누워있었고 허정우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목에 입을 맞췄다.
김소연을 발견한 그녀는 도발하는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우 오빠, 이건 언니가 제일 아끼는 테이블인데...”
납치된 날에 이미 마음을 다잡았지만 눈앞의 장면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다.
한때 김소연은 이 테이블의 메인석에 허정우가 앉아 있고 그의 바로 곁에 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꿈꿔왔다. 그녀는 이곳에서 작업하는 걸 좋아했고 이 테이블은 외할아버지가 생전에 물려준 유물이기도 하다.
그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두 사람의 손에 놀아났으니 참 허탈했다.
김은지가 대놓고 도발한 이상 김소연도 참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물 한 컵을 받아 두 사람에게 쏟았다.
“아.”
김은지는 머리가 젖은 채로 소리를 질렀다.
“언니?”
고개를 돌린 허정우는 김소연을 보자마자 얼어붙었고 눈빛에서는 착잡함이 느껴졌다.
이때 김은지가 연약한 척 그의 품에 안기며 일부러 손바닥에 난 상처를 보여줬다.
아니나 다를까 이를 발견한 허정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은지야, 손이 왜 이래?”
김은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김소연을 바라봤다.
“어제 언니가 집으로 온다고해서 엄마 아빠랑 기분좋게 맞이했는데... 언니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나 봐요. 실수로 여길 그었는데...”
“뭐라고?”
깊은 상처를 본 허정우는 표정이 굳어졌다.
“소연아, 동생은 좋은 마음뿐인데 꼭 이렇게 해야 속이 후련하니?”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김소연의 마음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바라보며 허무함이 밀려왔다. 납치를 계획한 김은지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고작 손을 베었다고 나무라는 이 상황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김은지는 뿌듯함을 느끼며 허정우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허정우가 약자에 꼼짝 못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강한 김소연 앞에서는 늘 주눅이 들었고 어느새 저도 모르게 김은지의 침대에 기어들어 갔다.
‘어제 나랑 엄마한테 망신 줬지? 너도 그대로 당해봐.’
“오빠, 언니한테 뭐라고 하지 마.”
울먹이는 김은지의 모습에 김소연은 웃음이 터졌다.
“들었냐?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말라잖아. 안 아파서 이러는 거야.”
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김은지의 손을 잡고 펜으로 상처를 꾹 눌렀다.
“악.”
김은지는 비명을 질렀다.
“김소연.”
그러자 허정우는 사나운 표정으로 호통쳤다.
김소연은 김은지에게 밟혀 아직 아물지 않은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당한 걸 그대로 돌려준 건데 왜 그래? 나한테 목숨 빚 하나 졌잖아. 어떻게 갚을 거야?”
허정우는 싸늘한 그녀의 표정에 소름이 끼쳤다. 죄책감을 느꼈으나 아주 잠깐일 뿐 그동안 회사를 꽉 잡고 있었던 김소연을 원망하여 자신에게 정당한 이유를 부여했다.
그 시각 김은지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오빠, 언니는 아직도 우리를 미워하나 봐.”
순진무구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녀는 허정우에게 김소연이 빚을 갚으러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허정우는 정신을 번쩍 차린 듯 김소연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물었다.
“넌 이제 한울 그룹의 대표 이사가 아니잖아? 여기 왜 왔어.”
김은지는 허정우에게 기대어 가슴에 박힌 금빛 배지를 내세웠다.
이를 본 김소연은 허정우가 맹세했던 약속들이 떠올라 또다시 비참해졌다.
“소연아, 넌 영원히 나의 대표야.”
김소연은 허정우를 철석같이 믿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허정우를 째려보고선 걸음을 옮겨 회의실의 문을 열었고 밖에는 모든 주주들이 서 있었다.
다들 김소연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듯 아무도 섣불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김소연은 무심하게 걸어가 대표 이사 자리에 서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들 앉으시죠.”
그녀의 아우라는 다년간의 굳건한 비즈니스 경력에서 비롯됐기에 위엄이 넘쳤고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과는 정반대의 포스를 풍겼다. 모두가 김소연을 두려워했지만 이제 실질적인 권력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여러 주주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허정우를 바라봤다.
허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김소연을 바라봤다. 그는 예전부터 그녀의 기세가 너무 싫었고 매번 무시를 당하는 상황이 너무 치욕스러웠다.
이때 옆에 있던 김은지가 부드럽게 그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화내지 마. 언니는 예전부터 저런 사람이었잖아.”
김소연은 두 사람을 가볍게 무시한 채 주주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한울 그룹은 제 겁니다.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허정우와 김은지에게 투표하려는 분이 계신다던데 사실인가요? 여러분, 전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깟 위조 유언장에 속아 넘어가실 겁니까?”
허정우는 고개를 바짝 든 채 당당함을 뽐내는 김소연을 보며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마침 김은지가 나섰고 그녀는 불쌍한척하며 진료기록을 내세웠다.
“언니가 무사하게 돌아와서 우린 너무 기뻐. 하지만 더 이상 아픈 걸 숨기지는 말자. 허 대표님도 언니를 걱정해서 이러는 거잖아.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면서 왜 모든 걸 혼자 감당하려고 해? 언니, 이제 회사 일에서 손 떼고 치료받자.”
김소연이 그녀의 섬뜩한 눈빛을 마주한 김은지는 지레 겁부터 먹었다.
그러나 허정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자 곧바로 자신감이 생겨 진료 기록을 김소연에게 건넸다.
“언니가 직접 봐봐.”
진료 기록을 확인한 김소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허정우를 바라봤다.
예전에 허정우를 대신해 계약을 따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려 심각한 불안증세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진찰을 받았고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허정우 단 한 명뿐이다.
그는 이 진료 기록을 김씨 가문에 건네며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다고 몰아갔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혀도 유분수지. 허정우를 위해 헌신한 아름다운 시절은 훗날 그녀를 쫓는 칼날이 되었다.
김소연은 허탈함이 밀려왔다.
주주들은 이 기회를 틈타 목소리를 높였다.
“병원 도장이 찍혀있네요. 사실이죠?”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걸 보면 모르시겠어요? 전 정신적 질환 따윈 없다고요.”
김소연은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녀의 기세에 압도당한 주주들은 곧바로 흠칫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평소 눈에 띄지도 않는 주주 한 명이 구석에서 김은지의 눈치를 살피고선 대뜸 입을 열었다.
“솔직히 회사의 이익을 가로챈 건 사실이잖아요. 회사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건 허 대표님과 은지 씨의 덕분이 아닌가요?”
“맞습니다. 허 대표님이 계약을 따내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은지 씨의 뛰어난 디자인 실력으로 한 단계 더 발전했고요.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게 아니라 해도 회사를 책임질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김소연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맞는 말이다. 허정우의 체면을 위해 자신이 따낸 모든 계약을 그에게 돌렸으니 무슨 명분이 있겠는가.
허정우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밤새워가며 김은지에게 원고를 그려줬다. 김은지를 회사의 간판으로 내세워야 나중에 결혼했을 때 둘만의 시간이 늘어난다는 그의 말에 현혹되어 멍청하게 모든 걸 도와줬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솔직히 그동안 회사를 운영하는 스타일이 많이 숨 막혔습니다. 능력도 없으니 이제 그만 물러나서 치료부터 받으시죠. 전 김소연 대표 이사의 사임을 찬성합니다.”
김은지는 사악한 눈빛을 드러내며 김소연을 바라봤다.
참담한 현실에 김소연은 현타가 왔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김씨 가문이 막강한 권력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정신병자인 게 밝혀졌는데 누가 쉽게 나서겠냐는 말이다.
오래전부터 꾸며온 그들의 계락을 이길 방법은 없지만 이 회사만큼은 기필코 되찾으리라 결심했다.
이때 허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대표 이사가 변경되었습니다.”
“새로 부임한 대표 이사는 김은지입니다. 다들 앞으로 열심히 해봅시다.”
김은지는 도발하는 눈빛으로 김소연에게 다가오더니 능청스럽게 악수를 청했다.
“언니, 치료 열심히 받아. 병이 호전되면 다시 복귀할 수도 있잖아.”
김소연은 단번에 그 손을 뿌리쳤다.
“손대지 마. 역겨우니까.”
“너...”
김은지가 본색을 드러내려던 순간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