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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서약피의 서약
By: Webfic

제8장

핸드폰 너머로 멋쩍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김소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그동안 관찰해 온 모든 것을 얘기했다. “돈은 꽤 많아 보였어.” 그 말에 정서우도 생각에 잠겼다. “네가 이런 얘기를 할 정도면 진짜 돈이 많다는 건데... 설마 용성 4대 가문 중의 하나인가? 이고허임이라고 불리잖아. 그런데 사람들이 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임씨 가문 아니면 이씨 가문인 것 같은데?” “임씨 가문 도련님들은 만난 적 있어서 얼굴을 알지? 그럼 이씨 가문인가? 유명세에 비해 워낙 베일에 싸여있는 사람이 많아서 가능성이 제일 큰 것 같은데? 어릴 때 만난 적 있어?” “응.” 김소연은 어릴 때부터 각종 연회에 참석했기에 이씨 가문의 도련님도 적지 않게 봐왔다. 하지만 외모와 기질은 전부 이 남자와 많이 달랐다. “설마 깡패인가? 두목은 아니겠지?” 정서우는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산으로 갔다. 그녀가 헛소리를 늘어놓자 듣기 싫었던 김소연은 곧바로 사이트를 열었다. 얼마 전 장례식장에서 일어난 일들이 다시 인기 검색어에 올라 사람들이 열띤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서우야, 설마 네가 한 짓이야?” “응. 이런 건 내 전문이잖아. 김씨 가문이랑 끝까지 한번 해볼 거야. 누가 이기는지 한번 지켜보자고.” 김기태가 결코 이대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기에 김소연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피곤했던 그녀는 정서우와 수다를 떨다가 샤워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때 한 남자가 들어왔다. 오늘 밤은 따로 잘 거라고 확신했던 김소연은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며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여긴 왜 왔어요?” 셔츠 단추를 풀며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방 안 가득 채운 여자의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너한테서 좋은 향기가 나네?” “그리고 여긴 내방이야.”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김소연은 잠옷을 챙기고 도망치려고 재빨리 움직였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은 정서우와의 카톡 대화창에 머물러 있었다. 부랴부랴 핸드폰을 챙기던 찰나 정서우가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파일명이 ‘참고 자료’로 되어있어 당연히 주얼리 디자인 관련 자료인 줄 알고 클릭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재빨리 고개를 숙여 확인한 김소연은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도대체 이딴걸 왜 보내는 거야.’ 핸드폰을 끄고 싶었지만 당황한 탓에 손이 말을 듣지 않았고 영상의 소리만 점점 커져갔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김소연은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결국 핸드폰을 끄지 못한 그녀는 황급히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게 있는 힘껏 필사적으로 이불로 가렸다. 방안에는 어색한 공기만이 가득했다. 남자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김소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오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내 침대에서 도대체 뭘 보고 있었던 거야?”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얼리 관련한 자료 좀 보고 있었어요.” 다급해진 김소연은 들키지 않기 위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얼굴이 터질 듯 빨개진 그녀의 모습은 남자의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그는 짓궂게 물었다. “주얼리 관련 자료? 같이 볼까?” ‘설마 들켰나? 알면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야?’ 김소연은 거절했다. 수치심과 분노가 밀려온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고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주얼리에 대해 잘 모르실 것 같은데 나중에 같이 봐요.”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호흡이 가빠진 채로 말로 안 되는 핑계를 둘러대는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귀여웠다. “아닌데? 나도 잘 아는 편이야.” 그는 매혹적인 웃음을 짓더니 천천히 이불 속으로 손을 뻗어 넣었다. 그러고선 몸을 숙이더니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가 서재에서 한 말 때문에 미리 배워두는 거야? 실행력이 아주 뛰어나네.” 실행력이라니? 김소연은 그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남자는 자연스레 핸드폰을 끄더니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오늘 주무시고 갈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자. 난 소파에서 잘게.” 김소연은 침대를 힐끗 쳐다봤다. 방금 전의 민망한 장면이 떠올라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핸드폰을 챙겨 욕실에 들어선 김소연은 정서우가 결판을 지으려고 했다. 때마침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영상 봤어?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잘생기든 못생기든 뭐가 중요해. 돈이 많으면 된 거잖아. 계약 결혼이라고 해도 이런 테그닉은 배워두는게 좋아. 혹시 알아? 정말 어마무시한 사람일수도 있잖아. 아무리 못 나가도 깡패 두목 정도는 될 거야.] 어이가 없었던 김소연은 가볍게 문자를 무시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방에는 희미한 불빛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남자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고 얼굴에는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말없이 가면을 바라보던 김소연은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이때 문 앞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강여진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재빨리 침대로 돌아갔다. 깜깜한 어둠 속, 눈을 뜬 남자는 말 없이 침대 위의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병을 앓고 있다. 불면증을 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몽유병과 환각에 시달려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기적처럼 나타난 사람 덕분에 치료를 받고 상태가 호전되었으나 얼마 못 가서 다시 재발했다. 사실 김소연이 차에 올라탄 그날 밤 정말 기적적으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젯밤과 오늘. 그녀가 옆에 있을 때마다 남자는 잠깐이나마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김소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다음 날 아침, 김소연은 정서우의 전화에 의해 잠에서 깼다. 핸드폰 너머로는 초조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연아, 너 임신한거 김씨 가문한테 들켰어.” 비몽사몽하던 김소연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씨 가문이 알게 됐다는 건 사이트를 도배한 기사가 뒤바뀐다는 뜻인데... 아니나 다를까 여론은 완전히 뒤집혔다. 김씨 가문은 김소연을 끌어내리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거를 내세웠다. [김소연, 알고 보니 임신한 지 2주? 깊은 산속에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한 후 정신이 나갔다고 하는데...] [아버지인 김기태 씨의 증언에 따르면 예전부터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어 약물 중독이 다름없다고 한다. 본인의 상태가 악화된걸 인식하고 일찌감치 유언장을 남겼다고 밝혀...] [김씨 가문, 김소연의 친필 사인이 담긴 유언장을 공개하나?] ... 김소연이 어이가 없었다. 어제는 감옥에 넣으려고 발악하더니 오늘은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정신병자로 몰아갔다. 한울 그룹을 관리할 능력이 없으니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밀며 어제 장례식장에서 한 말도 약물에 중독되어 내뱉은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김은지와 허정우가 구청 앞에서 찍힌 사진의 출처를 밝히며 결백을 증명했다. “소연아, 한울 그룹 대표 변경에 동의한다고 사인했어?” 사인이 있는 곳을 확대해서 본 김소연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납치되기 전에 허정우가 빈 종이를 내밀며 사인해달라고 하더라고? 그때는 솔직히 가족이라고 생각해서 별 의심이 없었어. 그런데 이렇게 사인을 도용해서 회사를 가로챌 줄은 몰랐네...” “회사는 이제 합법적으로 김은지의 소유가 됐어. 심지어 네가 죽을 만큼 노력하여 일으켜 세운 회사에서 네 남자랑 붙어먹었어. 하다 하다 이제는 널 정신병자로 몰아가네?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저런 것들을 싹 다 죽어야 하는데.” 정서우는 분을 못 이겨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김소연은 예상외로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얻은 건데 쉽게 빼앗길 것 같아? 오늘이 한울 그룹 주주총회야. 내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유언장이 유효할 리가 없잖아?” 그 말을 들은 정서우는 아차 싶었다. “맞네. 소연아, 가서 깽판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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