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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서약피의 서약
By: Webfic

제10장

비서가 들어와 허정우에게 보고했다. “라미에르 그룹의 다니엘 대표님이 협상하러 오셨습니다.” 허정우는 깜짝 놀랐다. 라미에르 그룹은 하반기의 주요 타깃이라 김소연과 여러 번 의논했음에도 그 어떤 피드백조차 받지 못했는데 왜 갑자기... 김은지는 머리를 굴리더니 교태를 부리며 걸어갔다. “오빠, 좋아? 내가 이걸 따내느라고 고생 좀 했어.” 허정우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라미에르 그룹이랑 연락을 취한 게 너였어?” 김은지는 김소연을 힐끗 쳐다보고선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지야, 너무 잘했어.” 허정우는 큰 계약을 따냈다는 생각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선 아차 싶었는지 김소연의 눈치를 살폈다. 김소연은 두 사람의 애정행각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싸늘함만 가득했고 그 모습이 오히려 허정우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은지야, 얼른 가서 다니엘 대표님 모셔 와. 이번 계약은 네가 끝까지 책임져.” 허정우의 반응에 김은지는 자신감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그녀는 김소연을 힐끗 보고니 비꼬는듯한 말투로 일부러 붙잡았다. “언니가 그렇게 원하던 라미에르 그룹 계약 건은 내가 따내게 생겼네? 허 대표님이 나더러 끝까지 책임지라는데 구경 좀 하고 가는 게 어때?” 김소연은 득의양양한 그녀의 모습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냐하면 라미에르 그룹에 대해서 김소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날 협상에 참석시키려는 거야?” “응.” 모욕감을 선사하고 싶어 안달이 난 그녀의 모습이 김소연은 그저 가소로웠다. “그럼 후회하지 마.” 5분 후. 다니엘이 회의실에 나타나자 하정우와 다른 주주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울 그룹의 대표 이사이자 수석 디자이너인 김은지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김은지는 당당하게 걸어가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서던 다니엘은 남다른 포스를 풍기는 김소연을 발견했다. “이분은 누구시죠??” 김은지는 경멸의 눈빛을 드러냈다. “오늘부터 회사에서 잘린 직원입니다.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으니 다가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다니엘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는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제출하신 디자인 원고가 너무 마음에 들어 계약하고자 특별히 찾아왔습니다. 아참, 작품에 대한 해석도 듣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당연하죠.” 김은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비서, 얼른 가서 내 디자인 원고 가져와.” 허정우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고 다른 주주들도 잇달아 칭찬을 퍼부었다. “역시 은지 씨가 실력이 탁월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누구보다는 훨씬 낫죠. 뻔뻔스럽게 버티고 있는 것 좀 보세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김은지는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때마침 비서가 주얼리 디자인 원고 한 권을 가져왔다. 김소연은 자신의 작품으로 가득 찬 원고를 보며 기분이 착잡했다. 그러나 김은지는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은 듯 당당하게 작품을 넘겼고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김소연을 묶어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훔친 원고로 당당하게 계약을 따낸 자신의 모습을 김소연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과 모욕감을 선사하고 싶었다. “대표님, 제 작품을 소개해 드리죠.” 자신 있게 입을 연 김은지와 달리 다니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는 마지막에 제출해 주신 원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은 겁니다.” 말을 하던 그는 원고를 꺼내 회의실 테이블에 펼쳤다. “이 설계도를 보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푸른 바다의 중심에 있는 이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루벨라이트를 사용했다면서요?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김은지는 눈앞에 펼쳐진 원고를 보고 정신이 아찔했다. 김소연이 라미에르 그룹에 제출한 모든 원고에 대해 김은지는 알고 있었다. 심지어 독창적인 작품은 그 속에 담긴 견해까지 탈탈 외웠다. 그런데 이 원고는 그녀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디자인이 복잡하며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고개를 든 김은지는 마침 비웃는듯한 웃음을 짓고 있는 김소연과 두 눈이 마주쳤다. ‘뭐지? 미친년이 나 몰래 수작을 부린 거야?’ “디자이너님? 어떤 견해가 담겨있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다니엘은 웃음을 머금고 재촉했다. 어느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김은지는 목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듯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고 그저 눈치를 살피며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봤다. “제가 사용한 선스톤을 이유는...” “루벨라이트 아니었나요?” 다니엘은 자신의 작품에 쓰인 다이아몬드 재료조차 틀리는 김은지가 생뚱맞았다. 게다가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듯 불안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의심이 들었다. “설마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건가요?” “그럴 리가요. 제 작품이 맞습니다.” 김은지는 즉시 반박했다. “그럼 설명해 보시죠.” 패기와 달리 머릿속이 텅 빈 김은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김소연은 식은땀을 뻘뻘 흐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속이 후련했다. 그녀는 주주들과 다니엘의 앞에서 작품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루벨라이트에는 깊은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디자이너라면 대표님의 취향에 대해 잘 알고 있겠죠?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표님은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대표님 회사에서 가장 핫한 제품이 블루 사파이어인 만큼 두 다이아몬드가 조화롭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다니엘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김소연을 바라봤다. “어떻게 이 원고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거죠?” 김소연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이 원고의 디자이너입니다.” 다니엘은 충격을 금치 못했고 기타 주주들도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언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당황한 김은지는 그녀를 밀어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대표님, 이건 제 작품이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 천재적인 디자이너라고요. 주얼리 디자인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사람도 바로 접니다. 사실 이 원고는 언니와 함께 의논하여 만든 작품입니다.” “언니, 블러드 다이아몬드로 바꿨으면 나한테도 얘기해줘야지. 대표님과의 계약을 망치려고 작정했어?” 회사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인 만큼 김은지가 강력하게 주장하자 다른 주주들도 금세 김소연에게 불만을 품었다. 오직 다니엘만이 자신의 소견을 이어갔다. “이 원고의 디자이너가 누구죠? 회사 내부 사정은 제 알 바가 아닙니다. 이번 물량이 큰 만큼 전 실력 있는 디자이너와 손을 잡고 싶습니다.” 김소연은 자신이 힘들게 그린 원고가 김은지의 변명으로 인해 더럽혀지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주얼리 디자인 공모전? 그것도 김소연이 대신 그려준 작품이다. 김은지가 직접 이 일을 언급했으니 김소연도 결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 원고의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다음 달에 주얼리 디자인 공모전이 열립니다. 저랑 김은지가 함께 참가해서 증명하겠습니다. 공모전에서 상을 탄 사람이 대표님과 손을 잡는 동시에 한울 그룹의 대표직을 맡는 게 어떨까요?” 그 말이 끝나자 김은지와 허정우의 안색은 돌변했다. 김소연이 이참에 대표 자리까지 꿰차려고 하자 김은지는 즉시 반대했다. “언니, 이런 도박을 하는 건 너무 경솔한 행동인 것 같아. 언니는 공모전에서 상을 타본 적이 없잖아.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는 그 꼴을 내가 어떻게 지켜보겠어...” 허정우는 김소연의 실력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옆에서 한소리 거들었다. “소란 좀 그만 피워. 정 비서, 당장 이 사람 쫓아내.” “저는 꽤 합리적인 제안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공모전에서 상을 타는 사람이 저와 함께 손을 잡는 거로 하죠.” 다니엘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허 대표님, 오늘 일은 많이 실망입니다. 일단 이번 계약은 없는 거로 하죠. 이만 가보겠습니다.” “대표님...” 허정우는 후다닥 일어나 그 뒤를 쫓았다. 회사 주주들도 눈앞에서 큰 계약을 잃자 초조함에 발을 굴렀다. 그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던 김은지는 이때다 싶어 한숨을 내쉬며 능글맞게 위선을 떨었다. “언니, 대표직을 되찾으려고 계약을 망치면 어떡해. 그런 유치한 제안을 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왜? 나랑 같이 공모전에 참가하는 게 두렵나 봐? 사람들한테 네 실력을 알게 될까 봐 무섭지?” 김소연은 싸늘하게 웃으며 반격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주주는 분노에 눈이 뒤집혔다. “회사의 이익을 해치고 주제넘게 행동하니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줘야죠. 김 대표님, 우리 물러서지 말자고요. 실력이 있으니 저런 사람을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잖아요.” “소연 씨의 작품을 표절한다는 소문이 아직까지 돌고 있는데 이참에 증명해요. 마음 약해지지 말자고요.” “맞아요. 천재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괜히 있는게 아니잖아요. 어차피 승부가 보이는 싸움이니 시원하게 망신준다 생각하고 참가하 는게 어때요?” 주주 중 아무도 김소연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다들 김은지가 상을 탈거라고 확신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김은지는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언니, 내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면 안돼. 알았지?” “그래? 궁금하네. 두고 볼게.” 김소연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선 걸음을 옮겼다. 전혀 타격 없는 김소연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던 김은지를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런데 때마침 계약을 따내지 못해 표정이 죽상 된 허정우가 돌아왔다. 뭔가 번뜩이는 생각이 떠오른 그녀는 대뜸 김소연의 팔을 붙잡고선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거 알아? 언니는 나무토막 같아서 오빠가 욕구를 못 느낀대. 내가 침대에서 오빠를 만족시키니까 자연스레 진료 기록을 보여주더라? 이러니까 사랑을 못 받지. 참 안쓰러워.” 김소연은 고개를 돌리더니 사정없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김은지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언니, 공모전을 언급하면서 계약 망친 건 그렇다고 쳐. 난 그저 정우 오빠 힘들게 하지 말라고 부탁한 건데 갑자기 때리는 건 너무 하잖아.” “김소연,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황급히 달려온 허정우는 단번에 김소연을 밀어뜨리고 김은지를 부축했다. 사실 김은지에게 화가 났었는데 맞아서 얼굴이 부은 모습을 보니 가슴이 미어져 곧바로 분노의 화살을 김소연에게 돌렸다. “은지는 항상 회사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넌 왜 그러니? 제발 마음 좀 곱게 먹어. 임신한 걸 뻔히 알면서 때리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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