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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서약피의 서약
By: Webfic

제7장

김소연은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허정우가 보낸 세 번째 문제를 그대로 전송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2초도 지나지 않아 김은지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녀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경고하는데 형부한데 찝쩍거리지 마. 내 뱃속엔 허씨 가문의 장손이 들어있다고. 넌 아무리 발악해도 나한테 안돼.” “형부라는 걸 알긴 하네? 개처럼 짖어대지 말고 그 입 좀 다물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허정우가 다시 나한테 넘어온다는 걸 너도 알 텐데? 까불지 마. 혼자 아이 지우러 병원 가는 게 얼마나 초라하니.” 허정우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말은 납치를 계획한 것보다 더 충격이었고 쉽사리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야.” 김소연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차는 이미 별장에 도착해 한참이나 주차된 상태였다. 차 안은 서늘함만 맴돌았다. 안전벨트를 풀던 김소연은 아차 싶어 고개를 돌렸고 곧바로 남자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순간 긴장이 밀려왔는지 한참이 지나도 안전벨트를 풀지 못했다. 남자는 그녀를 도우려고 몸을 굽히며 차갑게 경고했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얘기 꺼내지 마.” ‘뭐지? 결벽증이라는 게 이런 건가?’ 계약 결혼이면서 이것저것 간섭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꼬리를 낮추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런데 이때 큰 손이 다가와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김소연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고 순간 남자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남자의 차가운 입술에서 느껴진 은은한 담배 향기는 유독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김소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으나 남자의 입술은 이미 그녀에게 점점 더 깊이 파고들었다. 김소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그를 밀어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씩씩거리며 입술을 가렸고 긴장했는지 표정이 굳어버렸다. 화가 난 고양이처럼 털을 곤두세운 모습에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이 더해지자 어색하면서도 귀여웠다. 남자는 뚫어져라 김소연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첫 키스야?” 명문가의 아가씨인 만큼 김소연은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허정우와 만난 지 8년이 되었지만 스킨쉽은 첫날밤에 하는게 맞다며 터치를 거부했다. 어쩌면 이것이 허정우가 김은지의 침대에 올라간 이유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김소연은 당황함을 감추고 남자의 단단한 팔을 뚫고 나가려 했지만 그는 단번에 앞을 가로막았다. 나른한 몸은 거의 반쯤 품에 안겼고 그는 단호하면서도 진지하게 말했다. “미안해. 다시 돌려줄까?” 일부러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으나 눈에 들어온 건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눈동자뿐이었다. 하지만 전에 비하면 기분이 한결 좋아 보였다. ‘날 노리는 게 재밌나?’ “자중해요.” 김소연은 씩씩거리며 차에서 내려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 저녁 식사 때 남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강여진은 입을 삐죽 내밀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집에 오자마자 일하러 올라갔어. 하여튼 매너가 없다니까? 와이프랑 시간도 보내고 식구끼리 오손도손 밥 먹으면서 얘기도 해야지. 됐어, 우리 며느리 많이 먹어. 그래야 뱃속의 아이도 튼튼하게 자라지.” 보면 볼수록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듯하다. “아직 여기가 낯설지? 밥 먹고 아주머니랑 나가서 산책 좀 할래?” 김소연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님.” 저녁을 먹은 후 김소연은 별장 정원에 들어섰다. 어찌나 큰지 단독주택도 여러 채 있었고, 수영장은 물론 골프장까지 있었다. 김소연은 타이밍을 엿보다가 김영자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아줌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사실 저희가 결혼한 건 맞지만 전 아직 이름도 몰라요. 도련님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이곳에서 일한지 6개월이 되었지만 엘이라고 불리는 것밖에 모릅니다. 더 이상은 물어볼 자격도 없고요.” 김영자는 솔직하게 답했다. ‘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없는 건가?’ 김소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기에 그녀는 직접 조사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때 강여진이 커피 한 잔을 들고나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연아, 산책했어? 남편이 일하느라 고생하는데 커피 한 잔 정도는 가져다줄 수 있지?” 강여진은 두 사람이 계약 결혼한걸 몰랐다. 하지만 남자가 이런 결정을 한 가장 큰 이유가 강여진이었으니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김소연은 순순히 커피를 받아 들고 그녀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강여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더니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네 와이프가 어깨를 주물러 주고 싶다네?” 그 말을 끝으로 강여진은 문을 잠그고 나갔다. 김소연은 어색하게 자리에 서서 멀뚱멀뚱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남자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영상 통화를 하는 걸 보니 회의 중인 듯 하다. 김소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커피를 내려놓았다. 이때 회의가 끝난듯했고 곧바로 놀리는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사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어떻게 하면 한방에 임신이 될 수가 있죠?” “몇 년 동안 굶었는지 생각 좀 해봐. 당연한 거지. 하하하.” 멍하니 한눈을 팔고 있던 김소연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이 본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것도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주제로 말이다. 김소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황급히 남자를 힐끗 보았는데 그는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일에 몰두했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화 주제는 점점 수위가 높아졌다. “내가 형이랑 같이 화장실에 간 적이 있거든? 직접 봤는데...” 그제야 알아차린 남자는 화면을 흘겨보았고 표정은 차가웠지만 눈빛은 경청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얼굴이 붉어지는 김소연을 보며 짓궂게 물었다. “왜 아직도 거기에 서서 엿듣고 있는 거야? 자중해야지.” 남자는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뒤끝 있는 그의 모습에 김소연은 서둘러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듣기 싫어도 귀가 있는 걸 어떡해요.”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은 거야?” 남자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칠흑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김소연은 이 상황이 너무 민망해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남자는 그녀의 붉은 입술과 가는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의 조롱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그날 밤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대뜸 김소연을 불러세웠다. “상의할 일이 있어.” “규칙 하나 추가하려고. 3개월이 지나면 부부로서의 의무는 이행해야 된다는 걸 알지?” ‘3개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그의 눈빛을 보고선 문득 깨달았다. 김소연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남자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라 반박했다. “우린 계약 결혼이에요. 마침 저도 상의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아줌마한테서 들었는데 어머님은 단독 별채에 사신다면서요? 그럼 어머님이 이곳에 올 때만 부부인 척 연기하면 되는 거잖아요. 다른 시간은 자유 아닌가? 솔직히 집에 안 들어와도 되잖아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김소연은 이미 그의 기세에 살짝 눌렸다. “가능할 수도 있죠.” 눈빛만 부드러워졌을 뿐 남자의 싸늘한 분위기와 단호함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너한테는 거절할 권리가 없어.” 김소연은 자신이 이용당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감히 반항할 수가 없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3개월이면 아직 멀었잖아? 쳇, 복수만 끝내면 바로 떠난다.’ ... 씩씩거리며 안방으로 돌아온 김소연은 그제야 정서우에게 걸려온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를 발견했다. 전화를 다시 걸었을 땐 정서우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연아,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무사하게 탈출했어.” 정서우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설마 또 너를 해치려고 한 거야?” “맞긴 한데 이번에는 허술했어.” 김소연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실 그녀는 일찌감치 국에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미리 약 한 알을 먹었다. 정서우는 기쁨의 박수를 쳤다. “어머니한테서 처방전을 배워두길 잘했네.” 김소연은 어머니를 통해 의술을 배웠다. 처음에는 왜 이런 걸 알려주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의 험난한 앞날이 걱정되어 이미 길을 터놓은 게 아닌가 싶다. “실은 별거 없어.” “대단한 거지. 네 침술 한방에 내 위가 말끔하게 나았잖아. 너 예전에 사람도 구했잖아.” 김소연은 예전에 한 남자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 경쟁업체와 고객을 쟁탈하러 출장을 갔는데 마침 몽유병이 발작한 남자를 발견되게 되었고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침술로 사람을 구했다. 정서우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아참, 네 남편에 대해서는 좀 알아봤어?” 김소연은 그가 한 무례한 부탁이 떠올라 마음이 심란했다.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어. 이름은 엘이래.” “사이즈는?” 나이에 대해 설명하려던 김소연은 그녀의 질문을 듣자마자 발끈했다. “정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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