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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서약피의 서약
By: Webfic

제3장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싫어?” 김소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부터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생겼으니 낳길 원할 리가 없다. 남자는 천천히 걸어와 김소연의 턱을 잡았다. 그녀는 예쁘고 매력적인 얼굴에 스물셋의 어린 나이를 갖고 있다. “내가 힘이 좋은 편인 건 맞는데...” 김소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남자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무조건 낳아야 돼.” 남자의 태도는 강경했다. 김소연은 그제야 힘이 좋다는 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곧이어 남자는 싸늘함을 내뿜으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문을 열기도 전에 입구에서 잔뜩 흥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안에 있어. 나오면 확 죽어버릴 거야.” 그러다가 문이 잠겼다. 김소연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예요?” “너의 시어머니.” 남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그녀를 침대 곁으로 끌고 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맞춰줄 거지?” “뭐를요?” “우리의 첫날밤.” 김소연은 사람을 집어삼킬 듯한 그윽한 눈동자를 보고선 그의 뜻을 깨닫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저는 할 줄 몰라요.” 남자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선 큰손으로 박력 있게 옷을 잡아당겼다. “어머, 왜 이래요?” “할 줄 아네?”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문밖에서는 기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놈이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하네요.” 김소연은 어색한 자세로 남자에게 짓눌렸다. 우유처럼 하얀 어깨에는 남자의 시선이 닿았고 코끝에는 달콤한 향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김소연은 그의 탄탄한 근육이 몸에 닿자 귀까지 빨개졌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며느리 임신했는데 살살해야지.” 남자는 고개를 숙여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김소연을 바라봤다.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 김소연은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래도 돼요?” 남자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더 이상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넥타이를 벗으며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에 늘씬한 다리까지 더해지니 우아한 분위기를 한층 더 부각되었고 자기애가 강한 이유를 알 것만 같기도 했다. 김소연은 침대 머리맡에 웅크리고 있다가 초조한 눈빛으로 문을 바라봤다. “오늘 밤 여기서 같이 자야 해요?” “그러고 싶어?” 남자는 잡지 한 권을 집어 들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선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어린 임산부한테 손을 댈 사람으로 보여?” 그는 진지하면서도 비꼬듯이 김소연을 젊은 임산부라고 칭했다. 김소연은 짜증이 나면서도 그에 대한 호기심이 깊어졌다. ‘나이가 많나? 왜 계속 가면을 쓰고 있는 거지? 못생겨서 얼굴 가리려고 쓰는 건가? 아니면 보기 흉한 상처가 있나?’ 남자가 소파에 앉은 채로 아무 반응이 없자 김소연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불을 껐다. 김소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떠보듯이 물었다. “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걸 보니 뒷조사했나 보네요. 그럼 저도 물을게요. 몇 살이에요? 이름은요?” 한참이 지났지만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차갑고 냉정한 남자는 줄곧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뿜어냈다. 김소연도 어디서 꿀리지 않는 명문가 출신인데 이 남자 앞에서만 한없이 작아쳤다. “엘.” 김소연은 잠들기 직전에 낮고 깊은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도대체 뭐 하는 남자길래 이름도 알려주지 않는 거야... 설마 내가 알아볼까 봐 얼굴을 가리는 건가?’ ... 다음 날 아침. 김소연은 시어머니 강여진에게 잡혔다. “두 사람 정말 찰떡궁합이네. 너무 잘 어울려. 제비집이 임산부한테 좋다니까 많이 먹어. 우리 손주 어제 아빠 때문에 힘들었지? 할머니가 대신 혼내줄게.” ... 예상치 못한 말에 김소연은 사레 걸릴 뻔했다. 얼굴이 창백한 게 아니었다면 강여진은 생명이 1년밖에 안 남았다는 사실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밝고 활기가 넘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흰 셔츠에 검은 정장 차림으로 식탁 끝에 앉아 있는 잘생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고 오똑한 콧날에 얇은 입술을 조화롭게 잘 어울렸다. 남자는 강여진의 이런 모습이 익숙한 듯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물론 강여진과 다른 도우미들도 그의 가면에 적응된 것처럼 보였다. 김소연은 생각하면 할수록 궁금증이 커졌다. ‘도대체 누구지? 이렇게까지 신분을 숨기는 이유가 뭐야?’ 이때 이옥순이 위층에서 패드 하나를 가져와 조용히 강여진에게 물었다. “사모님, 아주 깨끗한데 치울까요?” 김소연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것을 바라봤다. 그녀의 반응에 강여진은 웃으며 상냥하게 설명했다. “첫날밤을 기념하려고 사용하는 건데 아줌마들이 생각도 없이 이런 걸 준비했구나.”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뭐 하는 거예요?” 남자는 불쾌함을 한껏 드러냈다. 그 후 긴 다리를 뻗으며 걸어오더니 김소연 앞에 놓인 잼을 집고선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처음인 건 당사자인 내가 알아요.” “내 말 맞지?”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선 김소연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김소연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고 순식간에 두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까이 붙어서 그런지 피부가 닿았고 거친 남자의 숨결과 좋은 향기가 느껴져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가 더 심한 말을 할까 봐 걱정되었던 김소연은 제비집 한 숟가락을 떠서 남자의 입에 밀어 넣었다. “말 그만하고 얼른 드세요.” “아가씨, 도련님께선 심각한 결벽증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옥순은 기겁하며 말했다. 남자는 말 없이 김소연을 바라보며 꿀꺽 삼키더니 옅은 미소를 짓고선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태연하게 행동할수록 김소연의 얼굴은 점점 홍당무로 변했다. 그녀는 남자가 쓴 숟가락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이때 강여진이 짓궂게 웃으며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소연아, 얼른 먹어. 이렇게 간접키스하는 것도... 잠깐만, 손이 왜 이래? 다쳤어?” 강여진은 덥석 김소연의 오른손을 잡았다. 김소연은 차가운 시선으로 고개를 숙였다. 납치된 날 김은지는 그녀의 손바닥을 밟았다. 다행히 의술을 알고 있었기에 긴급 처지를 했고 덕분에 이 정도로 회복했다. 김은지는 천부적인 김소연의 디자인 재능을 질투했고 이렇게나마 그녀의 두 손을 망가뜨리고 싶었다. “어젯밤에 왜 말 안 했어?” 남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싸늘하게 말했다. “아줌마, 얼른 의사 좀 불러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주치의가 들어왔고 김소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모셔 온 건 용성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다. 예전에 김씨 가문도 그에게 연락한 적이 있으나 아무리 요청해도 모실 수가 없었다. 그러니 김소연은 그 의사가 이 별장의 주치의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뭐 하는 집안이지?’ “쓰읍.” 김소연은 약이 손에 닿자마자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반응에 신문을 내려놓은 남자는 긴 다리를 꼬며 고개를 돌렸다. 하얗고 부드러운 손은 보기 흉한 정도로 다쳐있었다. 그날 밤 이 손으로... 마른침을 삼키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사에게 말했다. “손이 예쁘네요. 흉터 남지 않게 잘 치료해 주세요.” 강여진은 웃으며 김소연에게 하소연했다. “손이 예쁘다고? 하여튼 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김소연은 단번에 그 뜻을 알아챘지만 개방적인 시어머니는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자가 싸늘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자 강여진은 그제야 입을 닫았다. ... 아침 식사 후, 김소연과 남자는 강여진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다. “얼른 혼인 신고하러 가. 그래야 내가 마음이 놓이지.” 밖에는 이미 벤틀리가 주차되어 있었다. 남자는 신사답게 차 문을 열어줬고 김소연은 어색함을 무릅쓰고 안으로 들어갔다. 앞좌석에 앉은 비서가 노트북 하나를 건네자 그 후로 남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김소연은 노트북 안에 있는 정보를 조금이라도 엿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구청에 도착했다. 혼인신고 하러 온 커플이 많지 않았는데, 김소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익숙한 두 사람을 발견했다. 허정우와 김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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