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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서약피의 서약
By: Webfic

제2장

김소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 임신까지 되었으니 막막함이 밀려왔다. 단지 도움을 청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 사람에게 당했으니 분노와 치욕이 밀려왔다. 남자는 재빨리 김소연을 차에 태웠고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갈 곳이 없는데다가 용성에서 이름을 알린 인물이니 사람 많은 병원에 있다가는 꼼짝없이 김씨 가문에 잡혀가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녀는 작은 두 손을 맞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벤틀리를 관찰했다. 이때 차에 탄 남자가 전화를 받더니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네, 어르신. 김소연 씨를 찾았습니다.” “일단 흥분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직 착상도 못 했습니다.” 그는 어르신이라고 불리는 누군가를 달래고 있었다. 차는 곧 산 중턱에 있는 별장에 다다랐고 김소연이 차에서 내리자 입구에 서 있던 도우미 두 명이 앞으로 나서며 인사했다. “김영자와 이옥순 씨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앞으로 열 달 동안 소연 씨를 케어할 겁니다. 편하게 아줌마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김소연은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밀려와 정신이 아찔해졌다. “성폭행한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낳으라고요? 그 나쁜 자식한테 직접 얘기하러 오라고 전하세요.” “대표님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날은 다른 사람의 음모에 빠지신 겁니다. 소연 씨도 덕분에 목숨을 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김소연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들에 의해 강제로 방에 갇혔지만 결코 타협하지 않았고 일부러 단식투쟁을 벌이며 당사자한테 직접 만나러 오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저녁 무렵, 이옥순이 드디어 소식을 전해왔다. “도련님께서 저녁에 이쪽으로 오신답니다.” 김소연은 그 남자에 대한 호기심과 분노를 느끼며 초조하게 손을 뜯었다. 늦은 밤, 방에 숨어있던 김소연은 아래층에서 울리는 엔진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뭔가 대화를 나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거린 김소연은 본능적으로 옆에 놓인 꽃병을 집어 들고 숨을 죽였다. 문이 열리자 키 큰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고 몸에 온도 제어 장치가 있는 듯 순식간에 방안에는 서늘함이 맴돌았다. 전전긍긍하던 김소연은 그제야 매너 있게 노크를 한 후 안으로 들어온 남자를 보게 되었다. 겁에 질린 그녀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꽃병을 꽉 쥐었다. 남자는 담배를 끄며 손을 내려놓더니 단호하면서도 차갑게 그녀에게 주의를 줬다. “꽃병을 집어던지려고? 두 걸음 뒤에 소파 있으니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네?” 김소연은 난처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우아하면서도 터프함이 담겨있었다. 김소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를 주시했다. 그날 밤 짐승 같은 모습과 달리 지금은 점잖고 온화한 데다가 예의까지 갖췄다. 다만 몸에 밴 싸늘함과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는 사람을 압도했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차이가 너무 컸다. 남자가 돌아섰을 때 김소연은 그가 은빛 가면을 쓰고 있는 걸 보았다. 얼굴이 가려져 있어 정확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오똑한 콧대와 날카로운 턱선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남자는 김소연이 들고 있는 꽃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날 많이 아팠다면 내가 사과하지. 하지만 난 잘못한 게 없어.” 김소연은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커다란 몸을 앞세우며 압박하더니 비꼬는듯한 눈빛으로 김소연을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내 차에 기어 온 거지? 일부러 임신해서 우리 엄마한테 들키고 싶었던 거야?” “오해예요.” 김소연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남자의 태도는 여전했다. “우리 엄마 앞으로 1년밖에 남지 않았어. 그쪽이 원하는 대로 우린 계약 결혼을 할 거야. 1년 후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얼마든지 떠나도 돼. 돈은 내가 섭섭하지 않게 챙겨줄게.” 그의 말은 제안이 아닌 명령이었다. 김소연은 치욕스러웠다. “지금 날 아이 낳는 도구로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왜 동의해야 하죠?” 남자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TV를 켰고 김소연은 모든 걸 목격하게 되었다. “아버지인 김기태 씨의 증언에 따르면 바람을 피워 살해를 당한 게 맞다고 합니다. 김씨 가문은 내일 오후 이곳에서 장례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김소연 씨가 생전에 작성한 유서에 따라 한울 그룹은 하정우 씨가 인수하고 외할아버지가 남긴 거액의 재산은 동생인 김은지 씨가 물려받는다고 합니다. 김씨 가문은 여전히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김소연의 얼굴은 증오와 원망으로 뒤덮였다. 가족들은 그녀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 유언장까지 위조하여 모든 걸 빼앗았다. “김씨 가문에서 이렇게 대하는데 복수하고 싶지 않아?” “복수? 해야죠.” 김소연은 이를 악물었다. 사실 그녀는 거짓된 가족 관계를 너무 믿었다. 아빠는 늘 모든 걸 동생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허정우 또한 줄곧 김은지의 편을 들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결혼을 할거라는 맹세에 눈이 멀어 그동안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결국 남 좋은 꼴만 됐다. “이미 죽은 마당에 숨을 곳은 있고?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이는데?” 남자는 검은 눈동자를 치켜뜨며 늠름하게 담판을 지었다. 그는 계약서를 꺼내 우아하게 김소연에게 건네줬다. 한숨을 내쉬던 김소연은 눈물을 잔뜩 머금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없어요. 그쪽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남자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 결혼에는 규칙이 있어. 첫째,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둘째,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셋째,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걸 지키기만 한다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지.” ‘자기애가 남다르네.’ 김소연은 펜을 들고 계약서에 천천히 사인했다. 그러자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내일 혼인신고 하러 가자.” 김소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는... 꼭 낳아야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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