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김소연을 납치하여 잔인하게 ‘살해’한 지 불과 11일 만에 그들은 몰래 혼인신고 하러 이곳에 찾아왔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김소연은 숨 막히는 고통이 밀려와 그대로 얼어붙었고 뼛속까지 꿰뚫는 증오와 원망에 점차 눈물이 차올랐다.
과거의 모든 기억이 그녀의 초라함을 상기하는 듯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소연아, 나는 꼭 너랑 결혼할 거야. 앞으로 넌 허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는 거지.”
“소연아, 넌 정말 천재야. 우리 이번 한 번만 더 은지를 도와주자. 이번 콘테스트에서 우승만 하면 돼.”
“일단 결혼식부터 올리고 혼인신고는 나중에 하러 가자. 걱정마. 나는 절대 배신하지 않으니까.”
김소연은 그 말에 담긴 섬뜩함을 이제야 알아챘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 김소연은 남자의 냉철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풀렸다.
“시간 좀 줄까?”
김소연은 하얗게 질린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이어 직원 한 명이 다가와 공손하게 그들을 안내했다.
창구에 도착해서 혼인신고를 하는데 불과 2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김소연은 의자에 앉아 바쁘게 일하는 남자와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를 번갈아 바라봤다. 정말 신기하게도 서류에 ‘L’이라는 알파벳 하나만 적혀 있었다.
허탈함과 따분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보아하니 혼인신고를 하는 건 그녀의 발목을 잡아두고 강여진의 잔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틀림없다.
김소연은 상대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없이 무턱대고 혼인신고를 했다.
이때 김소연은 허정우와 김은지가 다른 창구로 향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휴지를 챙겨 화장실로 가는 김은지를 보자 김소연은 좋은 생각이 번뜩인 듯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잠깐만 다녀올게요.”
비서 김선재는 가녀린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선 고개를 숙여 남자에게 물었다.
“대표님, 어떻게 할까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남자는 시선을 노트북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가서 지켜줘.”
그 시각 화장실. 김소연은 립스틱을 꺼내 물에 섞고선 휴지에 잔뜩 묻힌 후 칸막이 위로 떨어뜨렸다. 가방에도 한 장 넣은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구청 밖으로 나온 김소연은 기사에게 잠깐만 차를 세우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몇 초 뒤 계단에서 누군가 굴러떨어졌고 여자는 겁에 잔뜩 질린 채로 소리를 질렀다.
“오빠.”
허정우는 부랴부랴 그녀에게 달려갔다.
김은지는 피로 뒤덮인 종이를 꺼내며 몸을 떨었다.
“갑자기 가방에 이런 게 들어있었어. 이거 김소연 피잖아. 설마 목숨 내놓으라고 찾아온 건가?”
허정우도 피로 뒤덮인 휴지를 보고선 깜짝 놀란 듯 뒷걸음질 쳤지만 곧바로 김은지를 부축하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김소연은 이미 죽었어. 파파라치한테 사진 찍힐 수도 있으니까 침착하게 행동해.”
“오빠, 나 무서워...”
김은지는 겁에 질려 눈빛이 흐릿해졌고 얼굴마저 창백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로를 껴안고 있는 개같은 남녀의 모습에 김소연은 침착하게 핸드폰을 꺼내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손바닥에 난 상처가 아려오자 어느새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동시에 계모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은지의 악운을 막으려고 지금까지 키워준 거잖아요.”
참 잔인하고 가슴 아픈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김소연은 자신이 기필코 김은지의 악운이 되리라 다짐했다.
김소연은 오후에 장례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정도는 애피타이저에 불과하지. 지옥이 뭔지 내가 제대로 보여줄게.’
김소연은 그녀가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경련이 심했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시죠.”
그런데 이때 큰손이 나타나 그녀를 잡았다. 줄곧 일에 집중하던 남자는 그제야 한눈을 팔고 김소연의 손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파?”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흠칫한 김소연은 순간 꾹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울지마. 내가 문질러줄게.”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주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주물렀다.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조차 드러나지 않았지만 남자의 차분함은 왠지 모르게 힘이 되었다.
김소연은 넋이 잃은 채로 쳐다보자 참다못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네가 뭘 하든 난 상관 안 해. 하지만 뱃속의 아이는 무조건 안전해야 돼.”
“명심할게요.”
어차피 이건 계약을 기반으로 한 결혼이고 남자는 아직도 그녀가 불순한 의도로 접근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러니 복수를 도와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마침 김소연에게는 몸을 피할 안식처가 필요했기에 결혼이 곧 그런 작용이다.
“모셔다드려.”
남자는 바쁜 일이 있는 듯 목적지도 말하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렸다.
김소연은 눈앞에서 사라지는 늘씬한 자태를 바라보며 기사에게 말했다.
“명성 장례식장으로 가주세요.”
...
그 시각 장례식장의 빈소. 노수영은 피 묻은 종이를 찢으며 싸늘하게 웃었다.
“립스틱으로 칠한 거잖아. 뭘 이런 거로 놀라고 그래.”
김은지는 아직도 겁이 났다.
“그런데 우리가 영혼결혼식을 준비한 건 아무도 모르잖아요.”
노수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비꼬았다.
“회사가 우리 손에 넘어와도 걔 친구 한 두명은 끝까지 발악할 거야. 이건 그냥 작은 속임수에 불과하니까 무서워하지 마.”
“장례식 곧 시작이야. 아빠가 언론 앞에서 김소연의 모든 재산을 너한테 물려준다고 발표할 거야. 이제부터 이 세상에는 김소연이라는 인간은 없어.”
김기태도 확신했다.
“이미 죽었으니까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없어.”
그들의 위로에 금세 안정을 되찾은 김은지는 곧바로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
오후 두 시가 되자 장례식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김씨 가문은 용성에서 잘 알려진 유명한 명문가다. 18세에 사업가로 성공한 김소연은 얼굴이 예쁘고 성품이 바른 데다가 능력까지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치부가 드러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장례식장이 흔들릴 정도였다.
김소연은 길가에 배치된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가진 게 없어도 익숙한 여러 매체의 연락처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기사가 구해온 혈장을 옷 속에 숨기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 후 손에 감긴 거즈를 떼어내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살아서 돌아올 줄은 몰랐겠지? 재밌겠네.’
애절한 음악이 울리는 동시에 김소연의 눈에는 텅 빈 관이 들어왔다.
“잘나가던 명문가 집안 아가씨가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가득했다.
“뉴스 못 봤어요? 내연남한테 살해됐다잖아요. 겉으로는 순진해 보여도 애인이 여러 명이래요. 사업이 크게 된 것도 몸 팔아서 하나씩 얻은 거라는 소문이 있어요. 게다가 바람피운 것도 모자라서 동생까지 계속 괴롭혔대요.”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제가 한울 그룹을 다니고 있는데 소연 씨가 회사 주주랑 같이 자는 걸 직접 봤어요. 심지어 사사건건 은지 씨한테 시비를 걸었다니까요?”
“됐어요. 이제 그만하세요.”
김은지는 서러운척하며 눈물을 머금었다.
“언니를 잃은 거에 비하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강요하면서 일 시킨 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거든요.”
“참 뻔뻔하네. 어떻게 동생을 괴롭힐 수가 있지? 저런 인간은 죽어도 싸.”
사람들은 저마다 분노를 터뜨렸다.
구석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소연은 이를 악문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닥쳐.”
이때 화가 잔뜩 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은지, 넌 죄책감 같은 건 못 느끼냐? 네가 소연이의 원고를 도용했잖아. 사람이 죽었다고 이렇게 헛소문을 퍼뜨려도 된다는 거야? 정말 역겹네.”
김소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의 절친인 정서우가 장례식장에 찾아온 것이다.
이를 본 김은지는 눈빛이 돌변하더니 재빨리 직원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직원은 황급히 달려와 정서우를 막았다.
“너 김소연이랑 한통속이지? 감히 나한테 뒤집어씌워? 당장 끌어내.”
힘으로 밀렸던 정서우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비참한 심경으로 김소연의 사진을 바라봤다.
“소연아, 많이 억울하지? 얼마나 힘들까...”
김소연은 코끝이 찡해졌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반드시 판을 뒤집으리라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추모가 시작된 후 김소연은 머리를 풀고선 사람들이 한눈판 틈을 타 서둘러 화환 뒤에 몸을 숨겼다.
그 시각 김기태는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 앞에서 발표했다.
“사랑하는 딸이 떠났지만 남은 사람은 열심히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생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회사와 모든 자산은 동생인 김은지에게...”
이때 관이 갑자기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