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허정우가 손을 들어 올리자 김소연은 이 역겨운 남자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은 심장이 다시금 날카롭게 찔리는 것 같았다.
사랑이 가장 순수했던 8년 동안 허정우는 자신이 허씨 가문의 사생아라 가정을 유독 소중히 여긴다며 김소연과 많은 아이를 낳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자리의 주인이 김은지로 바뀌었다.
“한심한 쓰레기끼리 어떤 자식을 낳을지 두고 보자. 너희 둘 언젠가는 반드시 지옥으로 떨어질 거야!”
김소연은 허정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돌아섰다. 허정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저도 모르게 차갑고 도도하게 돌아서는 김소연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 장면을 본 김은지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빌어먹을. 저년이 회사를 다시 차지하고 정우 씨를 빼앗게 둘 수는 없어!’
...
한울 그룹 본사 건물 아래.
정서우는 냉랭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김소연을 보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어때? 주주 중에 네 편 들어준 사람 있어?”
김소연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말했다.
“사업가들은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 마련이잖아. 그렇다고 지금 김씨 가문을 건드릴 바보는 없더라고. 하지만 오늘 허정우의 중요한 계약을 망쳤어. 그리고 김은지를 도발해서 대결을 받아냈지.”
“잘했어! 무슨 대결인데?”
“다음 달 열리는 주얼리 디자인 공모전에서 내가 김은지를 이기면 회사 대표이사 자리를 되찾을 수 있어.”
“와, 정말 제대로 한 방 먹였네. 허정우랑 김은지 그 둘 완전 겁먹었겠다!”
김소연은 냉랭하게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글쎄, 겁먹었는지는 모르겠어. 다만 회사의 주주들은 내가 이길 거라고 전혀 믿지 않는 눈치야. 전부 김은지를 두둔하면서 나를 조롱했거든.”
정서우는 이를 갈며 냉소를 띠고 노트북을 열었다.
“그 늙은것들이 네 실력을 뭘 안다고! 우리가 반드시 이겨야지! 내가 찾아볼게. 공모전은 10월에 열리고, 이번에 주관사는 지성 그룹인데? 게다가 최고 심사위원 자격도...”
말끝을 흐린 정서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김소연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화난 표정으로 정서우를 돌아봤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그 회사 이름이 뭐라고?”
정서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주얼리 업계의 제왕이자 네 최대의 라이벌... 지성 그룹. 이번 대회의 심사권을 완전히 쥐고 있대.”
차 안은 순식간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정서우가 고개를 돌려 김소연을 보니 그녀의 작은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며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 지성 그룹 대표가 네 가슴 작다고 이메일로 욕하지 않았어?”
“나도 그 남자가 고자일 거라고 저주했거든!”
“그럼 쌤쌤이네?”
정서우는 웃음을 참으려다 입꼬리가 떨렸다.
“지성 그룹은 업계에서 독보적인 강자야. 그 대표는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고 성이 이 씨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게 없잖아. 게다가 손에 꼽히는 재벌가 이씨 가문의 자제 중 한 명이라는 소문도 있어. 그런데 너 그런 인물한테 대놓고 적대했냐?”
“네가 몰라서 그래. 우리 집안과 그 집안은 전 세대부터 앙숙이었어. 그 자식이 우리 외할아버지 사업을 빼앗았다고! 그리고 우리 한울이 입찰만 하면 꼭 뺏어가더라. 몇 년 전에는 은강에서 내가 어떤 까칠한 남자를 구하느라 지성 그룹에 큰 계약을 빼앗겼어. 그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래, 그래.”
이 대표가 만약 젊은 남자라면 김소연과 진짜 앙숙이라 하더라도 두 사람이 묘하게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정서우의 뇌리를 스쳤다.
정서우는 김소연이 한참 동안 이 대표를 욕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너 이 대표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다며? 대체 왜 그렇게 철천지원수처럼 구는 건데. 어쨌든 지금 김은지를 이기려면 이 대표한테 잘 보여야 해. 그 사람이 심사위원이잖아.”
정서우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시스템에 침입해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 됐어! 이 대표가 내일 오후 3시에 로즈가든에서 일정 있대!”
“주소 나한테 보내줘.”
김소연의 표정을 본 정서우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자존심 다 버리고 그 원수한테 무릎 꿇고 빌려고?”
그러자 김소연은 그녀를 흘겨보며 쌀쌀맞게 대꾸했다.
“신경 끄시지.”
숙적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라니, 김소연의 마음은 이보다 더 복잡할 수 없었다.
...
다음 날 오후 김소연은 시간에 맞춰 로즈가든에 도착했다. 수없이 마음을 다잡은 끝에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지만 입구에서 보안 요원에게 가로막혔다.
“죄송하지만, 예약하셨습니까?”
이곳은 상류층이 자주 드나드는 고급 호텔로 예전 같았으면 김소연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카드가 정지된 데다 가진 돈도 없었다. 보안 요원이 그녀를 쫓아내려는 찰나 뒤에서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그 여자 당장 놔!”
고개를 돌린 김소연은 순간 멈칫했다. 날카로운 눈매에 어딘가 능글맞은 미소를 띤 젊고 잘생긴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한편, 남자도 김소연을 보더니 놀란 눈치였다.
‘어, 형수님이시잖아?’
그는 김소연을 찬찬히 살피며 가까이 다가가 묘하게 열정적인 태도로 말을 걸었다.
“김소연 씨 맞으시죠? 저는 로즈가든의 대표예요. 누구를 찾으러 왔어요?”
재벌가 자제처럼 보이는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김소연은 차분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 그룹 이 대표님을 뵙고 싶어서 왔어요. 오늘 여기 계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소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성 그룹 대표는 형이잖아?’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분을 만나고 싶으시다고요? 그런데 이 대표님은 아무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이 말에 김소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뵐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분의 취향을 저격해야죠. 이 대표님 취향이 좀 독특하신데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셔야겠어요.”
뭔가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김소연은 두말없이 여직원을 따라 탈의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목 부분이 깊게 파인 흰색 크롭 셔츠에 플리츠 스커트까지 더해 한눈에 봐도 로리타 컨셉이 물씬 풍겼다.
‘이 남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옷을 입게 한 거야?’
화가 난 김소연이 불쾌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그는 얼른 미끼를 던졌다.
“이 대표님은 바로 앞에 있는 2022호 방에 있어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던 김소연은 마지못해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김소연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를 욕실 문 앞까지 몰아붙였다.
“여기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이봐요, 문은 왜 닫아요!”
당황한 김소연은 곧바로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문밖으로 나간 고하준은 누군가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준아, 너 또 뭐 꾸미는 거야? 형이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거 모르냐? 괜히 방해했다가 목숨 열 개라도 모자라겠다.”
“형 신혼이잖아. 내가 대박 선물을 방에 넣어놨지! 막 깬 사람이 그거 보면 절대 못 참는다니까? 헤헤.”
고하준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형이 나중에 알면 나한테 진짜 고마워할걸?”
한편, 김소연은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방을 둘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에서 서성였다.
그때 갑자기 욕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김소연은 그만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져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히고 말았다.
“앗!”
남자는 순식간에 한 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올린 김소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미남의 목욕 후 모습인가?’
눈앞의 남자는 대략 188cm쯤 되는 키에 늘씬하고 탄탄한 체격을 자랑하고 있었다. 고개를 한참 들어올려야 겨우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윽고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세상에 정말 이런 비현실적인 외모가 있을 수 있나?’
그의 이목구비는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 깊고 매혹적인 눈매, 우뚝 솟은 콧날, 매끄럽고 얇은 입술, 게다가 깎아 자른 듯한 턱선까지.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는 얼굴이었다.
김소연은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껏 그녀가 보아왔던 어느 재벌가 자제도 그의 외모에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한편, 남자는 김소연을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깊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