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많은 사람들의 조롱 속에 이유영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타인의 눈에는 이지아로 인해 이유영이 창피하고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정작 타인의 눈길이 닿지 않는 각도에서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소진명 화가님, 죄송해요. 저희 큰딸이 뭘 잘 몰라서 그래요. 개의치 말아 주세요...”
“흥, 철이 없어도 너무 없네요! 똑같은 딸인데 한 명은 하늘에 있고 한 명은 바닥의 진흙이니 어머니가 돼서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지 모르겠네요!”
소진명은 좋았던 기분이 엉망이 되었다는 생각에 내뱉는 말도 각박해졌다.
오연주는 이지아의 헛소리로 인해 이유영이 소진명을 선생님으로 모시는데 영향이 갈까 싶어 분노를 억누르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화가님이 전시회를 보시는데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어요. 제가 돌아가서 엄하게 가르치겠습니다!”
말을 끝낸 오연주는 이지아의 팔을 잡아당겨 자리를 떠나려 했다.
바로 이때, 뒤쪽에서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진영우 화백님!”
“화백님!”
곧이어 한데 모여있던 사람들이 흩어지며 길을 내주었고 진영우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등장했다.
전시회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날 이지아가 병원에서 구해줬던 진영우였다.
“왜들 이리 시끄러워?”
진영우는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이 금기시되는 전시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시끌벅적한 것이 불만스러웠다. 게다가 이런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작품을 보는데 불편을 가져다준다.
“선생님!”
진영우를 본 소진명은 급히 종종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갔다.
소진명은 진영우를 부축해 안으로 걸어오며 설명했다.
“별일 아니에요. 방금 어떤 아이가 철없이 주최측에서 준비한 [우리 강산]이 모작이라고 해서요.”
“뭐? [우리 강산]?”
문득 멈춰 선 진영우의 안색이 엄숙하게 변하더니 그의 시선이 벽에 걸려 있는 길이 3미터의 그림에 닿았다.
점차 진영우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선생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죠? 그래도 화내지 마세요. 아까 단단히 혼을 냈어요!”
소진명은 말을 하며 손가락으로 이지아를 가리켰고 진영우은 시선을 돌렸다. 이지아를 바라보는 진영우의 눈빛에 흡족함이 어려 있었다.
“저 애 말이 맞아.”
그날 병원에서 진영우는 계속 혼수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지아가 떠나고 나서야 진영우는 잠깐 정신을 차렸고 진시호에게서 사건의 경과를 전해 들었다. 그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이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이지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선생님 이런 애랑은 말도 섞을 필요가... 네?”
말을 이어가던 소진명은 불현듯 진영우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고요하게 변했다.
“저 애 말이 맞아. 이 작품은 모작이야! 주최측에서 [우리 강산] 작품의 대여를 위해 개인 소장가를 찾아가 교섭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고 내 모작으로 대체하려고 했어. 내가 이전에 명확하게 거절했는데 주최측에서 내가 입원해 있는 사이 마음대로 이 그림을 전시회에 전시한 거야. 그것도 한서원 화가가 직접 그린 거라고 사칭하까지 하고 말이야! 정말 터무니없는 짓을 벌였어!”
소진명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 말씀은... 이 그림이 정말 모작이라고요?”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현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경험이 풍부한 미술 감상가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폄하한 이지아를 제외하고 이 작품이 모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진영우 화백님,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진영우의 말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작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대담하게 마음속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유영도 기대 어린 얼굴로 진영우를 쳐다보았다.
이때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진영우가 틀림없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명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지아가 모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리가 없다.
이전에 이지아가 집에서 모작을 알아맞힌 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이번에도 알아맞힌 것이라면 이유영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유영은 언제나 자신의 발밑에 깔려있던 이지영이 계속해서 주제넘게 나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진영우는 호통쳤다.
“예술이 농담을 할 수 있는 일이야?”
진영우의 말에 현장은 순간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지아가 했던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다들 믿기 어려웠다. 지금 이 순간, 방금 전까지 오만하게 이지아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쥐구멍이라도 파서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참 나이가 어린 여자아이도 전문가인 자신들보다 눈썰미가 좋으니 그들은 지금까지 허송세월을 보낸 것과 다름없었다.
“선생님 몸이 불편해서 오늘 안 오신다더니, 어쩐 일이세요?”
소진명은 창피함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사람을 찾으러 왔어!”
소진명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이씨 가문에서 왔어?”
“이씨 가문이요?”
오연주와 이유영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강현시에 유명한 이씨 가문은 그들뿐이 아니었고 중산층 가문일 뿐인 그들은 진영우가 직접 호명할 만큼 이름 있는 가문이 아니었기에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이지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조용히 뒤돌아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전시회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지아는 진영우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날은 침술로 진영우의 병세를 안정시켰을 뿐이지 완전히 병을 치료한 것은 아니다. 진영우는 깨어나자마자 분명 이지아를 찾았을 것이다. 다른 장소였다면 이지아도 도와줄 수 있지만 사람이 많은 전시회에서 그녀는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연주와 이유영도 함께 있어서 자신이 의술을 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들 진영우가 입에 올린 ‘이씨 가문’을 찾느라 이지아가 조용히 떠났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시 후에도 여전히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씨 가문에서는 안 온 건가?”
진영우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는 오늘 이씨 가문이 전시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분명 전해 들었다. 그래서 진영우는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
“전에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씨 가문의 사람이 날 구해줬고 오늘 특별히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어. 그리고 그녀에게 다시 한번 의술을 펼쳐 내 오랜 고질병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진영우의 말이 끝나자 주위 사람들은 일제히 이씨 가문의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현시에 있는 이씨 가문 중에 의술에 능한 가문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사람이 없었다.
한참 동안 이씨 가문의 사람을 찾던 사람들 얼굴에도 곤혹스러움과 초조함이 깃들었다.
오연주와 이유영도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렸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빨리 이씨 가문의 사람을 찾고 싶었다. 만약 남들보다 먼저 찾아서 진영우에게 데려간다면 호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애타게 찾아도 소득이 없자 진영우는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여기 오지 않은 건가?”
자신을 구해준 신의를 찾지 못한다면 진영우에게 남은 날은 기껏해야 두세 달이 전부였다.
“화백님!”
바로 이때, 진영우의 비서 진시호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현재 진영우의 몸 상태로 과로해서는 안 되기에 진시호가 대신 주최측과 교섭하여 앞으로 남은 진영우의 강의를 취소했다.
할일을 마치고 전시회 안으로 들어오던 진시호는 때마침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이지아를 보게 되었고 헐레벌떡 진영우에게 달려왔다.
“방금 그때 그 신의가 나가는 걸 봤어요! 막으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어요. 제가 사람을 보내서 찾아오라고 했어요!”
흥분한 진시호와 달리 진영우는 차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몰라.”
진영우의 나이가 되면 하루를 더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만약 이지아를 찾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건 하늘의 뜻일 것이다.
“진영우 화백님에게 몇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진영우가 사람 찾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아 보이자 이유영은 황급히 다가가 친한 척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이유영이 다가가기도 전에 진시호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안 돼요! 화백님은 몸이 안 좋아서 무리하시면 안 돼요! 화백님, 제가 휴게실까지 부축해 드릴게요.”
“그래.”
진영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유영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진시호의 부축을 받은 채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에 이유영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진영우가 전시회장를 벗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실의에 찬 이유영의 모습에 오연주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유영아, 진영우 화백님은 아마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을 거야. 우리가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상심하지 마.”
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우가 자신을 무시한 것은 맞지만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무시했으니 이유영은 상관없었다.
설사 이지아가 또 한 번 알아맞혔다고 해도 자신은 운성 고등학교의 우수 학생이고 이지아는 3년 동안 소년원에서 지낸 데다 최악의 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하는 쓰레기이다.
오늘 이지아가 주목을 끌었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의 신발을 드는 것만으로 과분해 해야 하는 존재라고 이유영은 생각했다.
“지아는 또 어디를 간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오연주는 이지아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지아는 지난번 주얼리 가게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매번 중요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 이지아의 행동은 오연주를 꽤나 놀라게 만들었다. 주얼리 가게에서 CCTV를 얻어낸 것도 그렇고 이번에는 혼자 [우리 강산]이 모작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오연주는 이지아가 개과천선하여 열심히 공부를 하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연주는 이지아가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이유영의 반만이라도 따라간다면 오연주는 사모님들 모임에서 적어도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오연주의 모습을 이유영은 눈에 담았다.
이유영은 겉으로 평온한 척했지만 남몰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지아, 또 나랑 해보겠다는 뜻이야? 널 소년원에서 이렇게 일찍 꺼내는 게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