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고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옆에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의 손을 뿌리쳤고 그 여자는 표정이 굳어버렸다.
“진희가 내 친구이기도 하거든. 친구 생일 파티에 참석하면 안 돼?”
이소현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줄 알았지. 그래서 미리 얘기하지 않았던 거야.”
이소현은 속으로 그런 그를 비웃고 있었다.
정말 날 생각해서 알려주지 않은 거야?
아니면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오려고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거야?
고진우는 설명을 마친 뒤 싸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왜 이 자리에 그녀를 불렀냐는 듯한 원망이 서린 눈빛이었다.
소진희는 괜히 마음에 찔렸는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이소현 씨 되시죠? 저는 주하영이라고 해요. 진우한테서 제 얘기 전해들으셨죠?”
고진우하고 같이 나타난 그 여자가 먼저 다가와 이소현한테 인사를 건넸다.
이 사람이 바로 고진우의 첫사랑인 주하영이었구나!
이소현은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고 숨이 턱턱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필경 고진우하고 3년 동안이나 연애를 해 왔으니 하루아침에 그한테 쏘아 부었던 사랑을 정리하기란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을 하지 않았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주하영 씨, 만나서 반가워요.”
주하영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소현 씨, 혹시 우리 두 사람 많이 닮았다는 얘기 들은 적 있으신가요?”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고진우의 안색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런 그를 힐끗하고는 입꼬리를 올린 이소현은 고개를 돌려 은근 도발하는 듯한 주하영의 시선을 마주쳤다.
“어머? 정말요?”
이소현은 촉촉하기만 한 살구눈을 깜빡거리며 순진한 말투로 답했다.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쪽보다 제가 훨씬 예쁘잖아요.”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전부 입이 떡 벌어졌다.
이소현은 항상 온순하고 얌전한 성격 아니었던가?
오늘은 말투에 가시가 돋혀 있는데?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걸 지켜보던 소진희는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만들 서 있고 저리로 가서 앉아요.”
주하영은 이소현에 대한 불쾌감을 애써 억누르고는 웃음을 지어내며 소진희한테 선물을 건넸다.
“진희야, 생일 축하해. 이건 선물이야.”
소진희는 그 선물을 받아보니 방금 이소현이 건넨 선물 봉투와 똑같다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안에 들린 선물 상자를 열어보았다.
“우와, 전부터 사고 싶었던 목걸이였어. 하영 언니, 고마워.”
이소현은 흠칫했다.
내가 산 목걸이하고 같은 거잖아?
주하영은 아까 이소현이 건넨 선물을 뜯어보았다.
“어머! 소현아, 네가 준 선물도 목걸이였네!”
“가짜겠지.”
소진희 뒤에 서 있던 한 친구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가짜라고 결단을 내렸다.
“이 목걸이 자그마치 천만 원이야. 일개 변호사가 한 달에 월급을 얼마나 받는다고 이 값비싼 선물을 살 수 있겠어?”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현장은 고요하기만 했고 의미심장한 눈빛들이 이소현한테로 쏠리고 있었다.
다들 그 여자의 말에 동의하는 듯한 태도였다.
단지 일반 변호사직을 담당하고 있는 이소현이 소진희한테 그 값비싼 선물을 사줄 돈이 없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고진우의 표정이 흐려졌다.
“소현아, 돈이 없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선물은 내가 대신 준비해 줘도 되잖아. 왜 하필...”
가짜를 선물하는 거야...
고진우는 쪽팔린 탓에 차마 그 뒤의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으나 다들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소현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고진우, 너도 내가 가짜를 선물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고진우는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묵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소진희는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분위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 소현이가 나하고 얼마나 친한데 가짜를 선물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들 말하지 마. 소현이 상처받아.”
말은 그렇게 해도 이소현은 소진희한테서 약간의 혐오감이 서린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이소현은 마음이 식어버렸다.
사실은 전에 자신한테 내보였던 그녀의 작은 배려 때문에 천만 원을 주고 선물을 샀던 것이었다.
3년 전 그녀는 집안에서 맺어준 혼사를 결사반대하며 홀로 해성으로 도망쳐 왔었다.
그리하여 이석동은 그녀의 카드를 정지시켜 경제적 지원을 전부 차단해 버렸었다.
다른 수가 없던 그녀는 집안 인맥은 하나도 동요하지 않은 채 자신의 노력으로 법률 사무소에서 일자리를 찾았었다.
갓 입사를 했었을 때는 신입이라 한 달 월급이 80만밖에 달하지 않았었는데 1년 정도가 지나 변호사 자격증을 따게 되자 월급도 어느 정도 인상이 되었었다. 허나 그 정도의 월급은 이 사람들한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진우하고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은 그녀를 빈털터리라 여기며 매번 함께 놀 때마다 은밀히 그녀를 따돌리거나 고립시키곤 했었다.
그나마 그들 중에서 소진희는 다를 줄 알았었는데 결국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었다.
어이없기도 하지.
그녀가 집안 혼사에 동의한다고 전화를 했었던 그날 이석동은 그녀의 카드 사용 권한을 회복했던 터라 그녀한테 있어서 이제 천만 원은 몇백 원에 가까울 정도였다.
“목걸이 나한테 줘. 나중에 다른 선물로 사다 줄게.”
고진우가 입을 열었다.
“소현이가 철이 없어서 그래. 미안해.”
소진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소현하고 고진우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목걸이를 고진우한테 주지 않으면 그의 체면을 깎는 셈이고 만일 목걸이를 돌려준다 하면 그녀마저도 이 목걸이가 가짜라는 걸 인정하는 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진우의 여자친구인 이소현은 물론 고진우마저 쪽팔리게 된다.
“돌려달라고 하는데 그냥 줘.”
이소현은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빛으로 고진우를 쏘아보았다.
소진희는 어쩔 수 없이 목걸이를 그한테 건네주었다.
옆에 있던 주하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진우야, 이소현 씨한테 뭐라 하지 마. 이소현 씨도 좋은 마음이었을 거야.”
고진우는 침묵을 지키고는 있으나 안색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같은 시각 누군가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게임 제안을 하고 있었다.
주하영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들한테로 다가가 술을 마시며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한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녀는 구석에 놓인 소파로 가서 앉아 있었다.
고진우는 냉담한 얼굴로 다가와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소현은 그런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참이 흘러 고진우는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돈이 없는 거면 비싸지 않은 선물을 사면 되지 왜 가짜를 사고 그래.”
“너도 가짜라고 생각하는 거면 나한테 돌려줘.”
이소현은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뚝뚝한 어조로 답했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쪽팔리는지 알아?”
이소현은 눈을 질끈 감고 두어 번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쪽팔린다고? 안에 영수증도 있는데 넌 확인도 안 해? 매장 직원한테 직접 가서 확인이라도 해볼까?”
고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영수증을 찾고 있었다.
영수증을 확인하고서야 고진우는 그 목걸이가 진짜라는 걸 믿을 수가 있었다.
그제서야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고 말투마저 다정해졌다.
“아까는 왜 영수증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
이소현은 콧방귀를 뀌었다.
“설명하는 게 귀찮아.”
말을 마치고 난 그녀는 계속하여 휴대폰에 몰두했다.
곧이어 옆에 있던 고진우가 목소리를 낮추어 사과하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오해했어.”
이소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게임에 열중했다.
고진우는 그녀의 옆에 앉아 더는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고 게임을 놀고 있는 사람들한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더 명확하게 설명해 보자면 그는 주하영한테만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이소현은 한 게임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마침 주하영을 바라보는 고진우를 확인하게 되었다.
게임에서 진 주하영은 사람들의 화성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들이켰다.
처음에는 고진우도 참을 만했었다.
허나 주하영이 술 세 잔을 들이키고 난 뒤 다음 잔을 계속하여 들이키려던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하영한테로 걸어가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술을 빼앗았다.
“위도 안 좋으면서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 하영아, 건강에 신경 써야 될 거 아니야?”
다들 고진우가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은 그들한테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주하영은 입을 삐죽 내밀더니 잔뜩 화가 나 있는 고진우와 눈빛이 마주쳤다.
“네가 뭔 상관인데?”
“술 그만 마셔.”
고진우는 게임하던 사람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둘러보고는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영이한테 술 권하기만 해 봐?”
그 말을 듣고 나자 다들 급급히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이소현은 냉담한 표정으로 소동을 지켜보더니 입가에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주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술잔을 다시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고진우는 주하영이 잡지 못하게 술잔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까치발로 재차 술잔을 잡으려던 주하영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고진우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고진우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한 손을 뻗어 그녀를 꼭 껴안았다.
“조심해. 넌 예나 지금이나 덤벙거리는 건 똑같네.”
볼이 붉어진 주하영은 고진우의 품에 기대어 애교 섞인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고진우, 너 미워.”
주위 사람들은 떠들기 시작했다.
고진우가 뭐라 말하려 입을 떼려던 순간 차갑기만 한 이소현의 시선을 마주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