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술자리로 고진우를 데리러 가게 된 이소현은 룸 밖에서 뜻밖의 말들을 듣게 되었다.
“진우야, 주하영이 귀국한다던데 이소현은 어쩔 셈이야?”
고진우는 담담한 말투로 임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소현하고 연애한 지도 3년 정도 돼 가잖아. 이제 주하영도 귀국했으니 둘 중에서 한 명은 선택해야 할 거 아니야?”
문틈 사이로 이소현은 담배에 불을 붙이는 고진우의 모습을 엿보게 되었다.
하얀 안개가 자욱해 가던 그때 잠시 침묵만 지키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도 몰라. 소현한테 상처 주기 싫어. 그렇다고 이대로 주하영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아.”
한 친구가 야유를 떨었다.
“주하영은 네 첫사랑인데다 뜨거운 연애를 했었는데 잊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야.”
다른 한 친구가 말을 끼얹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소현이 네 옆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고 얼굴도 예쁘장한데 여전히 주하영을 놓지 못하는 거야?”
고진우는 미간을 문지르며 약간 지친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소현이 예쁘다는 건 나도 알아. 처음에 이소현한테 구애했던 것도 얼굴 모양새가 하영이하고 흡사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연애하는 그동안 이소현한테서 주하영의 그림자만 찾아다녔었어.”
“주하영을 대체할 만한 여자를 찾은 거야?”
한 친구는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이소현이 안쓰럽게 느껴지네.”
다른 한 친구가 재차 물었다.
“그럼 언제 이소현하고 헤어질 거야?”
고진우는 담뱃재를 가볍게 털며 답했다.
“아직은 그럴 계획 없어. 소현이가 내 말을 잘 듣거든.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아쉬워.”
옆에 있던 친구가 고진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을 건넸다.
“진우야, 동시에 두 여자를 다 가질 수는 없어.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뭔 대수라고 그래. 두 여자랑 연애하면 되잖아.”
다른 한 친구가 껄렁껄렁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소현한테 죄책감이 드는 거면 적당한 선물을 사서 달래주면 되지. 여자를 달래주는 게 얼마나 쉬운데.”
고진우는 코웃음을 쳤다.
“너처럼 여자들 서너 명씩 한꺼번에 사귀는 사람인 줄 알아. 난 그런 놈 아니거든.”
밖에 서 있던 이소현은 자소하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녀는 식당을 나와 강변을 따라 걸어가며 몇 년 동안 고진우와 함께 지내왔던 나날들을 회상하고 있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고진우와 서로 사랑하고 있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그저 고진우 첫사랑의 대체품에 불과했었다.
강변에 서 있는 그녀의 왼쪽에는 차들이 끊이질 않는 큰 길가였고 오른쪽에는 깊숙한 강물이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세찬 강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는 중이다.
이소현은 결정이라도 내린 듯 휴대폰을 들어 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빠, 아빠가 정한 혼사에 동의할게.”
어두운 밤은 황혼의 가로등을 더욱 암담하게 비추었고 등불 아래에는 작은 벌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 서서 끝이 없어 보이는 어둠 속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이소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별일 아니야. 그냥 놀 만큼 다 놀았는지 이젠 약혼해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어서 그래.”
“그때는 내가 잘못했어. 철도 없었고. 엄마하고 아빠랑 말다툼하면서 가출까지 감행하지 말았어야 했어. 지금에 와서야 내 잘못을 깨달았어.”
“여기 일들 마저 마무리한 뒤에 강성으로 돌아갈게.”
...
밖에서 홀로 오랜 시간을 걸어 다니던 이소현은 저녁 10시가 넘어서야 경화원 별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장씨 아주머니는 이소현이 들어오는 걸 보고 손에 들고 있던 영양죽을 건네주었다.
“아가씨, 돌아오셨어요. 이건 아가씨가 대표님을 위해 끓이신 영양죽이에요. 아까 확인해 봤더니 다 식은 것 같아서 따뜻하게 데웠거든요. 지금 막 대표님한테 갖다주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아가씨가 오셨네요. 아가씨가 가져다드리는 게 어떨까요?”
이소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죽을 들고 위층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을 열자 책상 옆은 물론 화면만 덩그러니 켜져 있는 컴퓨터 앞에 아무도 없었다.
욕실 안에서는 물줄기가 콸콸 흐르고 있었고 불이 켜져 있었다.
오늘은 일찍 샤워하러 들어갔네?
이소현은 죽을 내려놓았다.
컴퓨터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카카오톡 알람음은 그녀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그녀는 마우스를 움직여 카카오톡 대화창을 확인했다.
주하영의 메시지였다.
[진우야, 나 돌아왔어. 오늘 저녁 11시 반에 해성 공항에 도착할 건데 네가 데리러 와주면 안 돼?]
이건 10분 전에 들어온 메시지였다.
그러니까 첫사랑을 마중하러 나가려고 샤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우야, 우리가 헤어진 뒤로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네가 잊혀지질 않아. 그때 해외에 나가 스펙을 쌓겠다는 이유로 너하고 헤어졌던 게 너무나 후회스러워.”
[너나 나나 자존심이 강한 탓에 누구 먼저 뒤로 물러서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아. 다만 너도 아직은 날 사랑하고 있는 거지?]
[진우야, 사실 몇 년 동안 나도 남자친구를 몇 명 사귀었었어. 그런데 얼마 못 가 다 헤어지게 되더라.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었어. 나중에서야 깨달은 건데 난 단 한 순간도 널 잊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동안 내가 왜 해성으로 돌아가지 못했는지 알아? 네가 아직도 날 미워하는 건 아닐까? 날 만나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네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 건가? 이러한 걱정들 때문에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었어.]
[그때는 내가 잘못했어. 진우야, 나 용서해 주면 안 돼?]
묵묵히 대화창을 보고 있는 이소현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다 대화창을 닫고 떠나려던 그때 고진우가 답장한 메시지가 올라왔다.
[하영아, 이것만 물을게. 아직도 날 사랑하긴 해?]
그는 컴퓨터에 카카오톡을 등록한 건 물론 샤워 중에도 휴대폰으로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있었다.
이소현의 가슴은 찌릿하고 있었다.
평소에 회사 업무로 매우 바쁘게 지내고 있는 고진우는 그녀의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이소현은 혹시라도 그의 업무에 방해가 될까 웬만하면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주하영의 메시지는 샤워 중에도 시간을 내어 답장을 해주고 있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뻔했다.
주하영은 곧바로 답장해 왔다.
[사랑해. 난 너만 사랑해.]
[그래. 데리러 갈게.]
그 순간 그녀는 그와 연애한 3년이란 시간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소현은 묵묵히 대화창을 닫았고 마우스를 제자리에 놓은 뒤 아무 일도 없었던 체했다.
그녀는 부엌으로 내려와 영양죽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위가 안 좋은 고진우를 위해 특별히 배워두었던 영양죽이었다. 미리 불린 백합, 율무, 팥을 끓는 물에 넣고 좁쌀을 추가해 약한 불로 천천히 끊이다 거의 익었을 때 작은 조각으로 자른 신선한 마를 넣어주면 된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도 그의 맛있다는 한마디에 2년을 끓여왔었다.
죽 한 그릇을 비우고 나자 고진우가 위층에서 느릿느릿 내려오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린 그는 산뜻한 복장 차림이었다.
“어디 갔었어? 아까 들어올 때 안 보이던데.”
이소현은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산책하러 나갔었어.”
고진우는 입구 쪽으로 향했다.
“볼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돼. 졸리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이소현은 눈빛을 떨구며 나지막이 답했다.
“그래.”
“저녁에 돌아오는 거지?”
이소현이 물었다.
신발을 신고 있던 고진우는 잠시 멈칫하다 입을 열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어. 일 처리가 늦어지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그래.”
그녀는 떠들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이토록 이소현은 착한 심성을 가진 여자였다.
고진우는 별다른 생각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위층으로 올라간 이소현은 고진우의 침실로 들어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책상 앞에 놓았던 영양죽은 그대로였다.
바로 그때 이소현한테로 혼사를 맺었던 강지태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소현아, 언제 강성으로 돌아올 거야?]
이소현한테 있어서 강지태는 그저 자신한테 친절히 대하는 동네 오빠에 불과했다.
그가 소현아라고 부르고 있는 그 호칭도 미혼 부부 사이의 애칭이 아니라 한 오빠가 여동생한테 부르는 호칭에 가깝게 느껴졌다.
[여기 일들만 마무리하고 돌아갈 거야.]
강지태가 재차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래. 오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알았어. 오빠, 고마워.]
강지태가 답장해 왔다.
[일찍 쉬어.]
그날 밤 고진우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이소현은 휴대폰 알람 소리에 깨어나게 되었다.
“여보세요?”
“소현아, 모레 내 생일인데 꼭 참석할 거지?”
비몽사몽하기만 한 이소현은 휴대폰에 적힌 번호의 이름을 확인하고 있었다.
고진우의 친구들 중 한 명인 소진희였다.
그녀와도 꽤 친한 사이였다.
“알았어. 주소 보내.”
통화를 마친 이소현은 침대에서 내려와 꽃단장을 한 뒤 백화점으로 가서 소진희한테 어울릴 만한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한참이 흘러 그녀는 어느 유명 브랜드의 신상 목걸이를 구입했다.
...
소진희 생일날 이소현은 일찌감치 현장에 도착했다.
“진희야, 생일 축하해.”
그녀는 선물을 건네주었다.
소진희는 선물을 받아 들고 예의 있게 감사를 표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던 그때 고진우는 낯선 여자의 손을 잡은 채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눈빛이 마주친 순간 고진우는 어리둥절해졌다.
“소현아, 네가 왜 여기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