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증거가 없어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차에 올라탔고, 차는 이내 빠르게 멀어졌다.
나는 그렇게 몇 초간 멍하니 있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염지훈은 지금 화가 난 듯했다.
감사 인사일 뿐인데, 그게 부부인 것과 무슨 상관인 거지?
더 자세히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곧장 회사로 돌아간 나는 계속해서 야근을 이어갔다. 아버지가 입원하게 되었으니 이제 송한 그룹의 일은 점점 더 많아질 게 뻔했고 점점 바빠질 것이다.
송한 그룹 사무실.
막 입구에 도착하자 안쪽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패드로 드라마 정주행 중이던 전지안이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패드를 내려놓고 테이블 위의 도시락을 내 쪽으로 밀었다.
“어디 갔었어? 내가 오늘 점심 가져다준다고 했었잖아. 다 식었네.”
전지안의 곁에 앉은 나는 도시락을 열어 먹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입원해서 다녀오는 길이야.”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저씨 입원하셨어? 왜?”
“간암 말기래.”
입안의 음식이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간암 말기라고? 어떻게….”
전지안은 잠시 멈칫하다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나 괜찮아!”
행여라도 닭살 돋는 말을 할까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생로병사는 살면서 피해 갈 수 없는 순리지. 너나 나나 사람은 다 죽어. 그냥 시간문제일 뿐이지.”
“쯧!”
그녀는 엉덩이를 움직이며 자리를 잡더니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난 널 위로하고 싶지 않거든? 내가 하려던 말은, 이렇게 됐으니까 너도 아저씨랑 제대로 잘 지낼 때가 됐다는 거야. 그때 일로 계속 싸우지 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조금 입맛이 없어져 젓가락을 내려놓은 나는 소파에 기대 천장을 보며 넋을 놓고 있다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진실 같은 건,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걸까?”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 당시 널 데려간 사람을 찾을 수 있으면 최고지. 그러면 그 사람더러 경찰에게 두 사람은 야반도주를 한 게 아니라 네 언니 이름으로 역에 널 데리러 간 다음에 널 속여서 변경에 넘긴 거라고 얘기해줄 수 있을 텐데. 근데 이제 그 사람은 찾을 수 없으니, 증거가 없는 걸 어떡하겠어.”
증거가 없다라….
5년 전, 20살 때,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동남아를 좋아해 잔뜩 기대를 품은 채 송여월이 연구생으로 있는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에 지원했었다.
입학날, 송정헌은 일하느라 바빴고 엄마도 집안 어르신이 아파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바람에 맨체스터 도시에 있는 송여월에게 나를 마중 나오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송여월은 만나지 못했고 나를 데리러 온 건 피부가 까만 남자였다. 그는 송여월이 자신을 보냈다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었다.
내가 그런 남자를 따라갈 리가? 하지만 송여월에게서 전화가 왔고, 학교에 일이 있어 나올 수가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따라가라고, 잘 안내해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날, 그 남자는 나에게 맨체스터 도시에 대해 소개해준다고 하며 나를 데리고 맨체스터 곳곳을 구경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었다. 나는 그를 송여월의 친구라고 여겼기에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고 나에게 같이 호텔로 가 물건을 챙기러 가자고 했을 때 별다른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갔었고 호텔의 위치가 외진 곳에 있다는 건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 호텔에 걸어 들어갔었기에 나중에 사고가 생겼을 때 모든 사람은 다 내가 스스로를 아끼지 못했다고 여겼고 속아 넘어간 것에 내 잘못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여은아, 정말로 호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안 나?”
전지안은 생각에 잠긴 나를 부르며 나를 향해 말했다.
“당시에 나랑 아저씨, 아주머니가 그 호텔에 찾아갔을 때 그 사장은 네가 그 남자와 방에 며칠이나 있었다고 했었어. 그리고 떠날 땐 그 남자가 부축해서 갔다고 하면서 어린 나이에….”
당시의 일은 CCTV도 없고 녹음도 없어 모든 것은 다 주변인의 말들로 맞춰지고 있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만한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문 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호텔에 들어간 뒤부턴 의식이 없어.”
그녀는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때 당시 일에 대해 경찰이 이리저리 조사를 해봤지만 네가 말했던 것처럼 송여월이 그 사람을 사주해 널 속였다는 건 알아낼 수가 없었어. 송여월의 핸드폰에는 통화 기록이 없었고, 네 핸드폰은 또 잃어버린 데다 가장 문제는 그 남자도 도망치는 바람에 송여월이 전에 그 남자와 접점이 있었다는 걸 증명해 줄 사람이 없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송여월이 그렇게 한 동기는 또 뭔데?”
동기가 뭐냐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내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야. 18년간의 가족애가 있는데 도무지 이렇게 한 목적이 뭔지 전혀 모르겠어.”
“혹시… 송한 그룹 때문일까?”
전지안은 나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네 부모님은 너랑 송여월, 두 딸 뿐이잖아. 나중에 이 거대한 송한 그룹은 분명 너희 두 사람 게 될 거란 말이야. 사실 난 전부터 느낀 건데 아저씨랑 아주머니는 너랑 더 친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어. 너희 가족이 같이 있으면 송여월은 늘 남 같았달까? 있잖아, 혹시 널 제거하고 너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송한 그룹을 혼자 독차지하려던 건 아닐까?”
그것 때문일까?
입술을 깨문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만약 송여월에게 정말로 그런 야심이 있다면 왜 그동안 계속 송한 그룹에 들어오지 않은 걸까?
전지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나야 모르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나는 그만 생각을 접고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됐어. 점심 고마워.”
혀를 쯧하고 찬 전지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벌써 축객령 내리는 거야? 얼마 앉아있지도 못했는데, 말 몇 마디 제대로 하지도 않고 사람을 쫓아내다니. 너처럼 현실적인 사람도 없겠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데?”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여은아, 여태까지 물어본 적 없었는데, 변경에 끌려간 반년 동안 진짜로 송여월이 루머 퍼트린 것처럼 홍등가에서 강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