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이서현과 안윤아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는 매장 입구로 향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서야 가까스로 매장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앞에 서 있던 몇몇 건장한 남자들 때문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없었다.
안윤아는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등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저기요! 혹시 무슨 일인지 아세요?”
남자는 갑자기 등 뒤에서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며 몸을 움찔했다.
“아이쿠! 깜짝이야! 아... 아가씨, 그렇게 갑자기 말 걸면 놀라잖아요.”
안윤아는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궁금해서요.”
그러면서 남자가 살짝 자리를 비켜 준 틈을 이용해 발끝을 들어 올리고 머리를 내밀어 매장 안을 보려고 애썼다.
이서현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윤아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시절과 똑같구나.'
남자는 안윤아의 호기심 넘치는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옆으로 비켜서 주었다. 그러면서 매장 안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기 무릎 꿇고 있는 저 애, 저기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인 것 같아요. 방금 어떤 손님이 고른 가방을 내려주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는데, 그 손님이 가방에 흠집이 났다고 화를 내면서 직원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가방을 안 사겠다고 협박하고 있었어요. 가게 주인도 손님 편에서 서니 어린 직원이 결국 무릎 꿇었네요. 근데 손님이 일부러 괴롭히려고 그러는 것으로 보이기도 해요.”
남자는 깊게 한숨을 몰아쉬며 그 소년을 향해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그 말을 들은 이서현은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무릎 꿇은 소년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눈이 커졌다. 그 여자는 바로 임태연이었다.
‘저 여자는... 임태연이잖아?'
이서현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안윤아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긴 후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윤아야, 저 여자가 바로 임태연이야. 우리가 어린 직원을 도와줄까?”
안윤아는 의욕이 넘치게 대답했다.
“임태연을 괴롭힐 수 있다면 당연히 해야지!”
그녀의 두 눈이 반짝였다.
안윤아는 이서현의 손을 잡고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옆으로 잠깐 비켜 주시겠어요? 도저히 못 참겠어요. 들어가서 어린 직원을 도와줘야겠어요.”
남자는 순간 흠칫하더니 옆으로 비켜 주며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서현과 안윤아는 그 틈을 타서 빠르게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
매장 안에서 어린 직원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린 소년은 이서현과 눈이 마주쳤다.
이서현은 그 소년을 자세히 보게 되었고, 생각보다 더 어려 보여서 놀랐다.
소년은 겨우 열여덟이나 열아홉 정도로 보였다.
하얗고 창백한 얼굴, 예리한 눈썹, 갈색 눈동자가 마치 사슴처럼 순수해 보였다. 그 눈은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소년은 또래보다 야위었지만, 몸에 적당한 생활 근육이 잡혀 있었다.
이서현은 잠깐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반면, 안윤아는 오로지 임태연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소년의 얼굴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임태연의 뒤로 다가가서 그녀가 들어 올린 손을 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잠시만!”
임태연은 안윤아의 고함에 놀라서 몸을 부르르 떨며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에야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려 안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세요?”
안윤아는 입꼬리를 비웃듯 올리며 대답했다.
“누구긴. 못 배운 티를 내는 X 년에게 한마디 하려고 온 정의의 사도지!”
그때 이서현도 안윤아의 곁으로 다가서서 나란히 섰다.
임태연은 두 사람을 보고 순간 눈에 독기를 드러냈지만, 이내 감정을 숨기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서현 언니도 이 매장에서 쇼핑 중이신가요?”
안윤아는 임태연의 가식적인 태도가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언니? 두 사람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지 않아? 오랜만이라니, 마치 보고 싶었다는 듯 말하네? 좀 솔직해져 봐.”
2년 전, 김씨 가문에서 열린 파티에서 안윤아와 임태연은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다. 그때 김도하가 나서는 임태연의 편을 드는 바람에 안윤아는 임태연에게 사과했었다.
그 사건 이후로 안윤아는 임태연과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임태연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안윤아에게 면박당하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물었다.
“안윤아, 여긴 뭘 하려고 온 거야?”
안윤아는 비웃으며 임태연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밖에서 들었는데, 알려질 만큼 알려진 임태연 씨가 일부러 어린 알바생을 괴롭히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어린 알바생을 도와주러 왔어.”
그 말을 듣고 소년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윤아,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았어? 이 직원이 먼저 제가 찜한 가방을 망가뜨렸으니 무릎 꿇고 사과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안윤아는 이서현에게 눈짓하여 소년을 일으켜 세우라고 한 후, 임태연에게 작심하고 독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임태연, 너 정말 못됐구나. 김도하가 네 이런 모습을 알면 뭐라고 할까? 정말 눈이 멀었지... 아니면 너 같은 불여우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다들 골반이 크고 가슴이 풍만해야 순산한다고 하던데, 넌 가슴도 없고 골반도, 엉덩이도 없잖아. 그래서 아직도 난임 치료나 하면서 병원을 들락날락하는 거 아니야? 제발 마음이라고 곱게 써.”
안윤아의 말은 임태연의 아픈 곳을 단번에 깊숙이 찔렀다. 임태연은 이를 악물고 안윤아를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안윤아, 그 입 다물지 않으면 도하 씨에게 말해서 제대로 혼내줄 거야!”
안윤아는 코를 후비듯 귀를 후비며 말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상간녀 주제에 나를 혼내겠다고? 올해 들어 제일 웃긴 소리야. 여기 내 친구이자 김도하의 법적 아내가 떡하니 서 있는데, 불륜녀 주제에 무슨 염치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
그 말을 듣자, 임태연은 옆에 서 있는 이서현을 적대적인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도하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어. 이서현 씨야말로 불륜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