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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만약 그때 김상철 회장이 나와 도하 씨의 관계를 반대하지 않았다면, 김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는 절대로 이서현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거야.' 이 생각이 떠오르자, 임태연은 또다시 이서현을 노려보았다. 이서현도 그녀의 적대적인 시선을 느끼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맞아요. 도하 씨는 법적으로 아직 제 남편이에요. 법적으로 아내인 제가 눈앞에 있는데 이렇게 까불 수 있는 임태연 씨의 용기가 정말 놀랍네요. 뻔뻔하다고 해야 하나요?” 이 말을 듣자, 임태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몇 분간 말이 없던 그녀는 겨우 몇 마디를 내뱉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주제에, 너야말로 불륜녀야! 이서현, 네가 도하 씨의 몸을 차지했을지 몰라도 도하 씨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거였어.” 안윤아는 우스운 꼴을 보았다는 듯 비웃었다. “임태연, 너야말로 불륜녀 주제에 참 당당하네!” 그러고 나서 안윤아는 일부러 더 큰 소리로 매장 입구 쪽으로 걸어가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여러분, 여기 좀 보세요! 남의 가정을 파탄 낸 불륜녀가 조강지처 앞에서 도발하고 있어요!” 안윤아는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임태연을 가리켰다. 매장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 대부분이 결혼한 여성들이었고, 그들은 임태연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 “퉤! 불륜녀가 뻔뻔하게 굴다니 정말 얼굴에 철판 깔았네.” “요즘 애들은 정말 예의도 없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네.” “저런 애가 명품 가게에서 쇼핑하다니! 남자가 돈을 꽤 많이 줬나 보네. 그러니까 불륜녀 노릇을 자처하지.” 일부 사람들은 임태연의 정체를 알아본 듯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저 불륜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TV에 나온 사람 아니야?” “맞아! 임태연이라면 얼마 전에 TV에 나와 피아노 치던 사람 아니야?” 유명인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구경꾼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꺼내 임태연과 이서현을 찍기 시작했다. 임태연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하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최근 그녀의 소속사는 해외 명품 브랜드와의 협약을 준비 중이었다. 이 시점에 이런 이슈가 터진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임태연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안윤아, 두고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남기고 임태연은 서둘러 선글라스와 모자를 꺼내 얼굴을 가린 채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안윤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서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좋았어! 이제야 속이 좀 풀리네. 사람들이 찍은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면 나도 몇 번 더 퍼뜨려야지. 임태연을 위해 제대로 홍보해 줄 거야.” 이서현은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김도하가 임태연을 얼마나 아끼는데,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겠어? 이 일이 퍼진다고 해도 김도하가 어떻게든 나서서 수습할 거야.” 임태연이 무명 시절부터 지금처럼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 스캔들이나 논란 없이 살아온 것은 김도하의 힘이 컸다. 안윤아도 이서현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그래. 김도하의 첫사랑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임태연의 뒤를 봐주겠지. 그래도 우리 할 수 있는 만큼은 했잖아.” 안윤아는 이서현을 위로하고 나서 옆에 서 있는 소년에게 관심을 돌렸다. “넌 어떻게 된 거야?” 그러면서 안윤아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신상 루이뷔통 가방을 주워 들고는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밖에서 들은 게 맞네. 임태연이 괜히 트집 잡은 거잖아. 가방은 포장도 뜯기지 않았는데 어디가 망가졌다는 거야.” 안윤아의 말에 소년은 불편한 듯 시선을 피하며 가게 주인을 몰래 훔쳐보았다. 그리고 겁에 질린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안윤아와 이서현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눴다. 이서현은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들고 계산대로 걸어가 말했다. “이 가방 제가 살게요. 결제하세요.” 가게 주인은 당황한 듯했지만, 카드를 받아 들고는 바로 결제를 진행했다. “3,600만 원입니다. 곧 직원이 가방을 포장해 드릴 겁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을 가리켰다. “이 가방의 커미션이 꽤 될 텐데, 이 친구는 저희가 잠시 데려가도 될까요? 커피 한잔하고 돌려보내도 괜찮을까요?” 가게 주인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이서현은 가방을 받자마자 소년을 데리고 매장을 나섰다. 임태연이 떠나자, 매장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다. 이서현과 안윤아는 소년과 함께 10분 정도를 걸어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안윤아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카푸치노 석 잔을 주문한 후 소년을 향해 물었다. “이제 얘기할 수 있지?” 소년은 불안한 표정으로 이서현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남동생이 이현인가요?” 이서현은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현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신분을 철저히 숨겼다. ‘그런데 이 아이는 이현이 내 동생이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있지?' 이서현의 놀라움을 눈치챈 소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하정우라고 해요. 이현과 같은 반 친구예요. 학교에서 이현이 자주 누나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누나와 같이 찍은 사진도 본 적이 있어서 알아봤어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이서현은 급하게 물었다. “그래. 오늘 임태연은 왜 널 괴롭힌 거야?” 하정우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임태연은 제가 이현의 친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빌미로 저를 괴롭힌 거예요. 그리고 그 가게 주인도 임태연과 아는 사이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임태연의 무례한 행동도 묵인한 거죠. 만약 두 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전 계속 괴롭힘을 당했을 거예요.” “사실 이현은 학교에서 별로 행복하지 않아요. 하지만 누나도 김씨 가문에서 힘들게 지내는 걸 알고 있어서, 누나에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서현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무슨 뜻이야?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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